'한 모금의 물'이 한국 마라톤역사를 바꿔놓았다. 아니 올림픽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인공은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에 나선 한국마라톤 대표팀의 최윤칠(84)옹. 최옹은 당시 올림픽 마지막 날 열린 마라톤에서 35㎞까지 선두를 달렸다. 후미그룹의 그림자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독주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금메달'쯤'은 떼어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최옹은 세계기록도 갈아치울 수 있는 매서운 기세로 결승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출발지점부터 2시간여 동안 최옹은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 탈수현상에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옹은 "남승룡 코치가 절대 물을 마시지 말라고 해서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굳이 생체리듬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 100리가 넘는 길을 달린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당시 런던은 폭염속에 끓고 있었다. 하지만 남코치가 누군가. 최옹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생과 함께 시상대에 올라 조선남아의 기개를 세계에 떨친 영웅이 내린 엄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고 말했다. 최옹은 결국 남은 구간을 눈물을 뿌리며 기권할 수 밖에 없었고 한국 마라톤이 올림픽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44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또 한 명의 영웅이 최옹 옆에서 거들었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 챔피언 함기용(82) 옹이다. 최옹과 함옹이 11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 홀에서 열린 제30회 런던올림픽 한국선수단 결단식에 참석해 후배들에게 당시의 경험담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신생국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기 한 달 전, 각각 18세ㆍ 20세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품고 올림픽에 출전한 이들은 6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비록 검버섯이 얼굴을 수놓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함옹은 "대표팀 67명의 런던올림픽 여정은 한편의 드라마다. 48년 6월21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뒤로 하고 열차 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어 후쿠오카~요코하마~홍콩~방콕~캘거타 등을 거쳐 런던에 도착하기까지 17박18일이 걸렸다. 그동안 배 갑판위에서도, 공항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기진맥진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표팀 최종명단에 오르지 못한 함옹은 이후 올림픽과 더 이상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50년 제54회 보스턴마라톤에서 1위로 골인해 세계 마라톤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함옹은 "마라톤뿐만 아니라 모든 올림픽 종목은 정신력 싸움에 메달이 달려 있다. 사생 결단의 각오로 나선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시상대에 태극기를 많이 올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세상이 좋아져 런던까지 열 서너시간이면 갈 수 있는 만큼 4년 동안 연습한 기량을 마음껏 펼쳐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최옹도 "64년만에 런던올림픽에 다시 참가한다고 생각하니 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설렌다"며 태극 전사 후배들의 파이팅을 당부했다. 런던에서 다잡은 금메달을 놓친 최옹은 4년 후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설욕전을 노렸으나 4위에 그쳤다.
이들 원로 육상인은 대한체육회(KOC)의 초청을 받은 참관단의 일원으로 런던 땅을 다시 밟는다.
한편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이날 결단식에서 "우리 선수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힘을 믿는다"며 "자신감을 앞세워 전진해달라"고 말했다.
박용성 대한체육회장도 인사말을 통해 "올림픽은 국민 화합과 축제의 장으로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무대"라며 "1948년 런던 대회에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전한 지 64년 만에 나서는 대회인 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기흥 한국선수단장은 "상상하기 어려운 훈련으로 철저히 준비해왔다. 반드시 금메달 10개 이상을 따내 10위 이내에 진입해 대한민국의 국격을 한 단계 더 높이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선수단 맏언니 김경아(탁구)는 결단식 현장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파이팅'을 외쳐 큰 박수를 받았다. 김경아는 "파이팅을 강하게 외치면 기가 모아지는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선수단 본진은 20일 런던으로 출발해 브루넬대학에 머물면서 현지 적응 훈련을 시작한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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