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들이 해외 곡물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세계적 이상기후로 인한 곡물생산의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는 반면, 수요증가와 투기자본의 유입으로 곡물가격은 연일 치솟고 있기 때문. 식량 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로선 해외 곡물시장이 기업들의 '블루오션'으로 여겨지고 있다.
STX는 10일 미국 워싱턴주 롱뷰항에 위치한 곡물터미널을 완공했다고 밝혔다. STX팬오션이 2009년 미 번기, 일본 이토추사와 2억 달러를 공동 투자해 설립한 이 터미널은 저장, 트레이딩, 운반 등 곡물 유통 전 과정을 자체 처리할 수 있는 원스톱 시스템을 갖췄다. 연간 처리 용량만 900만톤에 달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연간 곡물 소비량(2,000만톤)의 절반에 가깝다. STX 관계자는 "주력사업인 조선 분야가 경기에 취약한 것과 달리 곡물 가격은 오름세를 지속하고 있어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한 주요 곡물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 게다가 곡물 자급률(26.7%)이 점차 낮아지는 추세여서 가격변동에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세계곡물시장을 쥐락펴락하는 4대 메이저와, 이 시장에 일찌감치 진출한 일본계 종합상사에 수입물량의 약 73%를 의존하고 있어, 이들에 휘둘릴 소지가 많은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메이저들이 가격을 올린다고 하면 거기에 끌려갈 수 밖에 없고 이들의 눈밖에 나면 수입이 끊어질 수도 있다. 다른 어떤 상품보다 수입선 다변화와 독자 수입망 구축이 절실한 것이 바로 곡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곡물은 석유처럼 무기화, 투기화한지 오래다. 투기세력이 주도하는 곡물가격 폭등세가 우리 경제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원은 이날 보고서를 통해 "2008년 급등한 국제곡물 가격이 4~7개월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반영됐다"며 "가격 강세가 이어지면 4분기부터 곡물 관련 상품의 국내 물가가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대두 선물 가격은 9일 사상 최고치인 톤당 612달러를 찍었고, 밀과 옥수수 가격도 각각 작년대비 23%, 12.3% 상승했다.
이에 국내 대기업들은 곡물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지난해 인도네시아 팜유 농장개발 전문 업체를 인수하고 3만6,000ha 규모의 농장개발을 추진 중이다. LG상사도 같은 곳에 1만6,000ha의 팜유 농장을 확보했고, 현대중공업은 2009년 현대하롤농장에 이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6,700ha 규모의 영농법인 현대미하일로프카 농장을 설립했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해외 영농사업을 진행 중인 기업만 85개, 개발 면적은 4만2,300ha에 이른다. 여기서 생산ㆍ유통되는 곡물 규모도 17만7,00톤으로 기업화 단계로 진입했다는 평가다.
정부도 2020년까지 10조원을 투입해 곡물자주율(해외 생산ㆍ유통물량 포함)을 65%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내놨다. 그러나 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지난해 4월 '한국판 카길'을 꿈꾸며 민간업체 3곳과 미국 시카고에 설립한 aT그레인 컴퍼니는 아직까지 뚜렷한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aT의 지난해 곡물도입 목표량은 10만톤이었으나 실제 수입물량은 콩 1만1,000톤에 그쳤고, 올해는 실적(목표량 92만톤)이 아예 없다. 곡물 엘리베이터(저장ㆍ유통창고)를 인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지 저장 시설을 갖춰야 곡물의 직접 구매가 가능해져 가격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지만 시장 장벽이 높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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