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구청에서 '텃밭 상자'를 분양한다기에, 달력에 동그라미까지 쳐놓고 분양 날짜를 기다렸다.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고, 상자는 동네 주민센터에서 받았다. 시중보다 싼 가격에 큰 방석만 한 텃밭 상자 세 개와 유기질 비료, 배양토까지 넉넉히 내주었다. 텃밭 상자를 받으러 간 날은 흐리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우산을 쓰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아마도 빈 텃밭 상자들에 채워질 것들에 대한 상상과 기대치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 같았다.
상자 세 개를 갤러리 뒷마당에 두고 상추 모종 열 댓 개, 고추 모종 네 개를 사다 심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이 텃밭 상자에 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작은 걸 언제 키워서 따먹나 싶더니 하루가 다르게 부피를 불려간다. 대낮에는 곧 말라죽을 것처럼 시들하다가도, 해가 떨어지는 오후나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파릇파릇 상추 잎사귀에 힘이 들어가 있다. 점심식사 시간에 몇 잎사귀를 따서 접시에 담으면 식탁이 초록빛으로 풍성해진다. 따도 따도 다시 금세 잎사귀를 키우니, 이웃집 할머니께도 두어 줌 나눠드렸을 정도다.
꽃대가 올라왔으니 이제 상추 '농사'는 끝물인데, 바통 터치하듯 고춧대에 고추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한 일이라고는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가늘디가는 고춧대 어디에 저리 실한 열매 인자가 숨어있었나 싶다.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고추잎사귀에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제법 청량하다. 구색을 맞춘다고 고추 모종 네 개를 청양고추와 풋고추로 나누어 심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네그루에 열린 고추가 모두 맵다. 바로 따서 한 입 베어 물면 알싸한 것이, 사라졌던 여름 입맛이 새로 돋는다.
동네 친구 몇도 텃밭 상자를 함께 분양 받았는데, 한 개를 받은 친구부터 여러 개를 받은 친구까지 제 집 모양새와 식구 수에 따라 개수가 다르다. 심은 채소류의 종류도 달라서, 방울토마토나 가지, 오이 같은 열매채소를 심은 친구도 있고 쌈 채소나 온갖 종류의 허브를 심은 친구도 있다.
요즘 한창 수확기인 탓에, 휴대전화의 인스턴트 메신저가 바쁘다. 방울토마토가 빨갛게 맺힌 모습부터 가지꽃이 핀 모습, 바질 잎을 따서 만든 스파게티 요리를 찍은 사진들을 보내온다. 저마다 자기 수확물 자랑이 한창인 것이다. 업무로 바쁜 중에라도 '아침에 베란다에 나왔다가 깜놀, 드디어 토마토가 열렸어'라든가, 보라색 가지꽃이 핀 사진을 받으면 미간이 펴지면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나도 손톱만한 흰 고추꽃이 핀 것을 발견한 날 아침,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보냈었다. 일 또는 가족과 관계된 일상의 여러 문제들, 어르신들의 부고나 누군가가 건강을 잃었다는 황망한 소식들 사이로 잠시 가지꽃과 고추꽃이 끼어들어 핀다.
주변의 한 지인은 제법 규모 큰 텃밭농사를 짓느라 저 멀리 경기 파주까지 주말 새벽마다 자유로를 달려 나간다. 시어머니는 무릎관절염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옥상에 스티로폼 상자들로 텃밭을 꾸려놓고, 하루에도 수없이 옥상 계단을 오르내리신다. 소꿉장난처럼 작은 텃밭 상자 세 개에서 기쁨을 맛보고 나니, 이제 그 '텃밭 농부'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 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우리들의 삶에는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 있는데,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올리브>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는 단골 커피숍의 여종업원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것이 '작은 기쁨'에 해당한다. 요즘 나와 동네 친구들에게는 텃밭 상자가 그런 작은 기쁨이 되어준다. 일생에 큰 기쁨은 그리 많지 않으니, 이렇게 작은 기쁨들을 쌓아 가는 일도 필요할 것 같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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