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한때 닮고자 했던 일본은 장기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고령화 충격마저 본격화 된데다 자산버블 붕괴와 재정악화로 자체적인 회복을 일궈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유사한 배경을 가진 우리의 고민은 깊어진다. 일본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경제의 버블화를 막고 고령화 충격을 이겨낼 수 있는 경제활력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전략산업에 의존한 요소투입적 성장 대신 새롭고 다변화된 성장기반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 동안 지식기반경제, 녹색성장을 추구해온 기본 취지이다. 물론 경제운영 방식도 과거 드라이브식 접근과는 달라져야 한다. 본질적인 변화에 답이 있다. 그러나 성장패러다임의 전환은 결코 쉽지 않다. 실제 과거의 성공 방식에 익숙한 성공주역들이 스스로의 변화를 주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어려움은 최근에 전개되고 일련의 상황에서 쉽게 확인 가능하다. 특히 거듭되는 금융불안과 위기 속에서 제대로 된 금융의 역할이 아쉬운 상황이다. 과거 담보위주의 관행으로 초래된 가계부채 문제는 이후 거듭된 정책개입을 초래하면서 이미 국가적 이슈로 확대되었다. 자칫 문제해결을 위한 적극적 대응은 시장원리를 영구히 훼손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원칙만 되풀이할 경우 시스템 차원의 위험이 커질 수 있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금융의 실패를 보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양산되고 있지만 정작 담보가 취약한 서민과 청년경제는 보호와 지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은 필요한 변화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개발시대에 유효했던 산업정책과 금융시스템이 미래 성장의 장애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단기실적 위주의 평가 관행은 시장평가를 무시할 정도의 자기도취적 현실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을 강화시켰다. 반면에 높아진 위험요인과 복잡다기화된 사회를 배경으로 사회지배구조는 책임소재 파악조차 어려운 집단적 위험기피형으로 바뀌었다. 중장기 차원의 공공이익을 지키기 위한 물가안정, 재정건전성 관련 노력은 단임 정권하에서 일관성마저 상실하고 있다. 당장의 결실을 가져가는 계층과 비용만 부담하는 계층간의 갈등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성장의 질적 측면이 간과되는 가운데 중산층의 퇴조는 경제 및 사회의 안정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낙후된 시스템과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 책임회피형 지배구조로 인해 임시방편차원의 대응책만 양산되고 있다. 단기실적위주의 평가기준이 정착되면서 외부영향 평가나 중장기적 기여도는 무력해진 지도층의 우려로만 남는다. 그 결과 서민 금융부터 다양한 중소기업 지원책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붓는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 일본의 재정적자가 바로 과거답습형 대응의 결과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신중하고 일관된 구조적 접근이 배제된 시스템 차원의 문제는 여지없이 우리의 부담만 키운다.
최근 들어 청년창업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창업의지마저 이벤트방식의 지원으로 키워낼 수 있다는 가정은 또 다른 현실인식의 엇박자를 뜻한다. 지원대상이 임시방편적인 경쟁심화 업종위주로 선정되거나 지원방식이 시장수요에서 벗어난 일방향 구조라면 그 결과는 명백하다. 지금이라도 조급증에서 벗어나 성장동력을 다변화하는 차원에서 신중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외부지원에 의존한 생존이 아니라 최대한의 다수가 참여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미래설계이다. 잠재능력의 발굴에 필요한 것은 공정한 시장규율과 경쟁 환경의 조성이지 민간의 창의성마저 연출하고 주도하려는 요소투입적 성공공식이 아니다. 이제 사일로 안에서 보여지는 운전석의 터널비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불확실한 우리의 현실을 헤쳐나가는 첫 걸음임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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