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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얼룩의 탄생'낸 김선재/ "시공 가르는 세상… 얼룩은 고유한 흔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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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얼룩의 탄생'낸 김선재/ "시공 가르는 세상… 얼룩은 고유한 흔적이죠"

입력
2012.07.06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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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발자국. 자동차의 바퀴자국. 과거 이곳에 있었던, 하지만 지금 여기 없는 사물의 흔적들. 20세기 포스트구조주의의 선두주자 자크 데리다는 현전(現前)과 부재(不在) 사이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경계선을 '흔적'이라 일컬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 안과 바깥 사이,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는 모호한 시공간을 시인 김선재는 이렇게 변주한다.

'각자의 갈래에서 출발한 우리는 한때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아니다' ('상상마당' 부분)

'자정은 흔적을 지우는 시간/ 기도도 없는 자행(字行)을 지울 시간' ('12시에 이별하다' 부분)

시인 김선재. 2006년 실천문학에 소설이, 2007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돼 등단했다. 지난해 첫 소설집<그녀가 보인다>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최근 첫 시집 <얼룩의 탄생> (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소설가 성석제, 김연수, 한강, 시인 정호승 등 시와 소설 두 분야에서 등단한 작가가 적지 않으나, 등단 후 몇 년이 지나면 대개 한 분야에 집중하게 된다. 최근 국내 문학계에서 두 분야 모두 무람없이 넘나 드나드는 건 이장욱씨 정도. 김씨의 재능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3일 소공동에서 만난 김씨는 "소설로 먼저 등단한 후 시 쓰기를 포기했는데, 마지막으로 투고한 잡지로 등단하게 됐다"고 말했다. 등단작은 신재효(1812~1884)의 '광대가'를 빌려 아버지의 죽음을 회상한 '광대곡'. 김씨는 "제 아버지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시기에 쓴 시라 애틋함이 있다"고 말했다.

'평생 피소에 발을 담그고 날지 못한 당신 가슴속에 기르던 귀뚜라미를 놓아주세요 날개 없는 새를 허공에 풀어놓아요 한 번도 당신이었던 적이 없어서 나는 왜 나인지 알지 못해요' ('광대가' 중에서)

시집 2부가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연을 숨긴 시, 풍경을 형상화한 서정시가 주를 이룬다면, 1부는 최근의 달라진 감성을 담았다. 이번 시집에서 자주 등장하는 얼룩, 꿈, 사이 같은 시어는 시공간의 모호한 경계를 그린다.

'지평의 먼 선 위를 아슬아슬 걸을 땐 얼룩이 돼야지 눈을 가리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부분에서 전체로, 그 전체의 한 모서리로'(표제작 '얼룩의 탄생' 부분)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얼룩은 "눈앞에 현현하는 상이 아니지만 어느 날 문득 기억할 수 있는 존재"다. "작년 집에 비가 새서 공사를 하면서 오래 전 썼던 편지를 발견했는데, 얼룩이 묻어있더라고요. 얼룩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흔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동음이의어 활용,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겹치기, 시의 주체 없애기 등 다양한 실험을 통해 '안과 밖을 지운'(시 '이상한 마음의 쓸쓸한 정오') 김씨의 시들은 새로운 서정을 들려준다. 여름날 더위에 지쳐 빠져든 한낮의 '오수'(시 '가위')처럼, 시집은 선명한 풍경 대신 미지의 장소를 끊임없이 펼쳐내며, 슬픔과 담담하게 대면한다. 본래 삶이란, 사랑이란, 그러한 것이라는 듯.

'오수에 빠졌네 차갑고 더러운 나는 가능하면 이곳에서 먼 곳을 상상하네 상상이 가능할 때까지 가상과 상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은 쓸쓸하고 조용한 꿈' (시 '가위' 부분)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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