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에서 비롯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한지 4년이 다 되간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부동산 폭락이 금융위기로 전이되지 않은 예외적 국가로 분류돼 왔다. 정부는 그 공로가 은행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40~60%로 제한해온 선제적 규제에 있다고 자랑해왔다.
하지만 최근 우리 정부도 긴장한 기색이다. 집값 하락이 장기화하면서 수도권 외곽에서 LTV가 70~80% 수준에 도달한 경우가 늘고 있고, 5월 주택담보 연체율이 5년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부동산 불황이 금융 부실로 번지려는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5ㆍ10 부동산 대책의 실패로 오랫동안 부동산 시장을 좌지우지 해온 정부마저 정책의 신뢰를 잃어버리며 불안감이 더 커진 모습이다.
그렇다면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도 구입을 포기하고, 올려달라는 보증금은 대출로 막으며 전ㆍ월세 생활을 계속해야 할까. 서둘러 결정하기 전에 잠시 그레고리 번즈 미 에모리대 신경경제학 교수의 유명한 실험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번즈 교수는 누구나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닮은꼴 도형을 고르는 문제를 피실험자들에게 주고 맞히게 했다. 그런데 피실험자들 중 한 명만 진짜고 나머지는 진짜 피실험자를 헛갈리게 하는 들러리였다. 시험결과 피실험자가 혼자 풀 때는 닮은꼴 도형을 모두 맞혔지만, 들러리들이 일제히 틀린 답을 지목하면 피실험자가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잦았다. 오답률이 무려 41%였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피실험자가 정답을 말할 때와 다른 이들의 판단에 휩쓸려 오답을 말할 때 사용한 뇌의 부분이 달랐다는 것이다. 주변의 오답에 휩쓸릴 때는 뇌의 시각과 공간지각을 판단하는 부분이 활성화됐다. 이는 주변의 압력을 받으면 피실험자가 마지못해 틀린 답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를 다르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변의 압력을 뿌리치려 할 때는 고조된 감정과 관련이 있는 편도체가 활성화됐다. 대세를 거스르려면 막심한 마음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실험은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은 모든 정보가 즉시 정확히 반영된 것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효율적 시장가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실제 시장 참여자들은 객관적 정보보다 종종 집단적 흥분과 공포에 휩쓸리고, 그래서 시장에서는 거품과 폭락이 되풀이 된다.
거래가 사실상 마비 상태인 지금 우리나라 주택시장에는 공포가 짙게 깔려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대선 정국 편승 상황을 과장해 특혜를 더 얻어내려는 건설업계와 동조하는 일부 언론의 책임도 있다. 집을 가진 사람이나 집을 사려는 사람은 모두 '번즈의 실험실' 속 피실험자 꼴이다.
사실 높은 전세가격, 여전히 낮은 자가보유율, 줄어드는 미분양 물량, 꾸준히 늘어나는 주택청약저축 가입자 등 주택가격 하락이 멈출 때가 가까웠다고 볼 수 있는 신호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싸게 팔려고 해도 사는 사람이 없어 사실상 가격이 제로로 떨어지는 부동산 몰락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는 식의 자극적 경고가 잇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집을 살만큼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번즈의 실험실'에서 벗어나려면 잠시 귀를 닫고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인가'를 곱씹어보며 투자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기준으로 집을 골라야 한다. 게다가 지금 주택시장은 구매자 위주의 시장이 아닌가. 잘만 흥정하면 집주인이 값을 더 깎아줄 가능성도 높다.
물론 가까운 시일 내에 집값이 큰 폭으로 반등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무리 혹독한 경제위기도 4~5년이면 회복기에 접어든다.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가 붕괴되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주택가격이 물가상승률만큼은 오른다. 주택을 재테크 대상이 아닌 생활필수품으로 생각한다면, 적당한 가격에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았는데 뒤로 미룰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런 합리적 판단이 늘어나야 우리 경제가 부동산시장 폭락이 금융부실로 이어지는 일본식 장기 불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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