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늘 같은 장소에 며칠마다 한 번씩 나타나니 사람들이 짐작하여 전기수를 찾아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관중들은 그가 뻔히 듣는 데서도 마음놓고 신통이 방통이 하며 즐거워하는 거였다.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은 뒤에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던 어느 날 서일수와 이신통은 내외주점에 아침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방에서 빈둥거렸다. 출출하기도 하고 날이 궂으니 을씨년스러워서 이신통이 유삼(油衫)을 둘러쓰고 빗속을 뛰어가서 구리개 약전 거리의 주막에 달려가 술과 안줏거리를 시켜왔다. 그를 따라 중노미가 모판에 부침개와 자반구이에 술국을 얹어 가져왔고 이신통은 거위병 두 개를 양손에 거머쥐고 돌아왔다. 서일수가 병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고 소주임을 알고는 반가워하였다. 첫 잔은 아랫사람이 먼저 따르고 권하면서 마시고, 둘째 잔은 윗사람이 응대하여 따라주고 마신 연후에, 서로 안주로 입과 속을 달래고 세번째의 잔을 나누면서 비로소 각자의 주량과 흥에 따라 연거푸 마시거나 몇 차례에 나누어 마시거나 하는 것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가끔씩은 천둥과 번개도 지나갔다. 서일수는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신통에게 술술 풀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와 나이 차이도 많고 알게 된 지도 몇 달에 불과하나, 이렇게 함께 자고 먹기를 혈육과 같이 하였으니 실로 인연이 기이하다 할 것이네. 이제는 서로의 성정도 알고 세상에 대한 생각도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내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내 선대가 원래 양반이었으나 조부 때에 괘서(掛書) 사건에 연루되어 집안이 적몰되고 나는 어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동승이 되어 덕산과 진천 일대의 산사에서 스님으로 성장하였네. 내가 글을 배워 불경과 유학을 공부한 것은 속세로 치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월명 큰스님의 가르침 덕분이었지.
내가 절에서도 온전히 숨어살 수 없었던 것은 임술 난리 이래로 봉기꾼이 되어 떠돌던 임효(林曉)라는 자 때문이었네. 그는 영남 사람으로 일찍이 현감의 토색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촌민들과 더불어 수령을 쳐죽이고 몇몇이 도망하여 화적처럼 떠돌았다네. 그리고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거기서도 대두가 되어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관군 여럿을 상해하고는 난이 진압된 뒤에 충청도로 흘러 들어왔다네.
내가 진천 태령산의 보적사 암자에 있을 적이었는데 두 눈에 불꽃을 붙인 듯한 사십 대의 사내가 불목하니를 자원하여 찾아왔다네. 암자의 지킴이에 지나지 않는 나와 수행승 두엇이 있는 작은 절에 양식도 없거늘 불목하니든 공양주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며칠을 드나들더니 야밤에 내 방으로 불문곡직하고 찾아와서는 자신의 쫓기는 처지를 발설하는 것이었네. 그러니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나와도 신세가 비슷하여 그를 거두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우리는 큰절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인근 고을로 나다니며 시주를 받아다 근근이 양식을 빌어먹곤 하였다네.
그가 천지도에 들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거기서도 수년 전에 이미 위험한 짓을 자초하여, 그렇지 않아도 신도들은커녕 식구들조차 보살필 수 없던 신사(神師) 어른을 도피의 막바지까지 몰아넣고 말았다네. 그 뒤로도 임효라는 자는 계속해서 자신과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모으러 하산하여 돌아다니다 오곤 했지. 그가 일 년 반쯤 산사에 거처하는 동안에 아마 백여 인쯤 모은 것 같았지. 박도희도 덕산 사는 유생으로 그때에 연이 닿았네. 사실 박인희 박도희 형제는 내가 잘 알던 사람들이었네. 내가 수덕사 큰스님 밑에서 수행하고 있을 적에 심부름으로 박 씨 댁에도 드나들었고 그 댁의 노모가 신실한 신도여서 철마다 재도 올리고 했거든.
임효라는 자는 자기 뒤에는 수십만의 도인들이 있으며 일단 봉기하여 산간의 군현을 점령하고 나면 사방에서 백성들이 호응하여 올 것이라며 그러면 단번에 충청도 감영까지 떨어질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네. 박 씨 형제가 아직 젊었고 나라의 제도와 정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음을 알아서 의기에 불타고 있던 무렵이라 그를 따라나섰던 모양일세. 박도희가 나를 만나러 진천의 보적사에 찾아왔다가 임 씨를 만나고는 그만 넘어가고 말았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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