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농민 단체인 농협이 수입농산물을 팔겠다고 나섰다. 내세운 이유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결혼 이주여성을 위해서’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가 다문화사회로 빠르게 변화 중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농협이 본분을 잊은 처사라는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농협유통 강홍구 대표는 최근 “바나나를 주식으로 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 출신 신부들이 농촌에 많은데, 이들이 지역 농협매장에서 바나나 판매를 원하고 있으며 농촌지역 식당들도 레몬 등 수입 식자재 판매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수입농산물 판매 의사를 밝혔다. 강 대표는 수입농산물 판매를 반대하는 대다수 농민들의 정서를 의식해 “구체적인 판매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농협에서 판매된 수입농산물은 별도로 구분해 더 많은 이익금을 농민단체에 돌려주는 것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며 추진 방침을 공식화했다.
농협유통은 소규모 구ㆍ군 지역에서는 열대 과일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 반면 수요는 꾸준히 증가해 농협에서 수입농산물 판매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농협은 법적 강제 사항은 아니지만 농협 설립 취지와 농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현재 매장에서 국산 농산물만 판매하고 있다.
강 대표 주장처럼 21만명에 달하는 이주여성들이 주로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역 농협매장에서 이들을 위해 수입농산물을 판매할 필요성을 무조건 무시할 수 만은 없다. 서울대 농경제학부 임정빈 교수는 “이주여성 수요를 감안해 수입농산물을 판매하면 다른 손님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국산 농산물이 수입산에 비해 제품이 좋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장기적으로 농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농민단체들은 최근 수입과일이 인기를 끌면서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되자 농협이 수입 농산물 판매의 길을 열기 위한 구실로 이주여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란 의혹을 제기한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장경호 부소장은 “현재도 농협 매장이 조합원들이 생산한 농산물 판매 보다는 잡다한 공산품들 판매에 주력한다는 불만이 농민들 사이에서 팽배한 상황인데 이제 수입 농산물까지 팔겠다고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이주여성이 아닌 농어촌 주민들도 상대적으로 값싼 수입 농산물 구매가 늘면서 결국 농협매장이 자유무역협정 이후 쏟아져 들어오는 값싼 수입 농산물이 농어촌 지역마저 장악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이주여성들마저 농협의 방침에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강성의 사무처장은 “농협이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공연히 이주여성을 앞세운다”며 “농촌 매장에서 수입농산물을 팔게 되면 우리나라 과일을 좋아하는 시부모와 고국의 과일을 먹고 싶어하는 이주여성 며느리 간 갈등만 키울 것”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농축수산물 판매 비중이 51%가 넘는다는 구실로 농협매장은 대형마트의 강제 휴무에서 제외되는 ‘51% 룰’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민간 유통업체들도 비판 대열에 합세했다. 한 민간 유통업체 관계자는 “농어촌을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각종 특혜를 누리고 있는 농협이 수입 농산물을 판매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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