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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9) 수술실-갈등하는 멸균의 통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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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9) 수술실-갈등하는 멸균의 통제공간

입력
2012.06.2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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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 아는 세상이 겪어야 할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젊은 인턴 의사에게 관록의 한 외과 의사가 묻는다.

-수술을 잘 하려면 뭐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가?

-기술? 경험? 시설과 장비?

-집도의의 상상력이야. 똑 같은 몸도 같은 병도 없거든.

(일본 만화가 샤토 슈호의 의학 만화 <헬로우 블랙잭> 에서)

혈관이나 장기들이 해부학 교과서의 그림처럼 가지런하지도 않고, 수술 전 검사 결과와 배를 연 뒤 보게 되는 병의 양상이 다를 때가 있다는 것. 그런 온갖 변수들을 상상해서,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머뭇거리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개인의 권위나 평판보다 앞세워야 할 의사로서의 책임감, 생명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전면적인 사명감이다. 그리고, 막중한 책임의 공간인 수술실은 모든 부정적 가능성들이 최대한 배제된 통제 공간이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몸이 열리는 순간, 환자의 장기(臟器)는 고유의 작동을 시작한 이래 아마도 처음 외부의 위협적인 환경과 대면한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온ㆍ습도와 미심쩍은 공기, 조도. 그 눈부신 빛 줄기를 타고 찌를 듯 달려드는 낯선 시선들과 섬뜩한 기구들…. 제 주인(환자)은 온 존재를 집도의의 판단과 처분에 내맡긴 채 의식도 감각도 없이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누워있다.

수술실은 특별하고 예외적이지만, 어느 누구도 한 생애 내내 비껴갈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두려운 공간이다. 또 환자의 입장에서는 질병의 종류와 상태에 따라 최대한 피하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고, 한없이 갈망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서울 도심의 한 종합병원에서 만난, 수술실 근무 경력 18년의 한 간호사는 수술의 행정적 절차를 설명하며 "우선 환자가 침대를 타고 내려 오면…"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침대를 탄다'라는 생경한 표현이 그에게 그 공간이 지닌 일상성의 진술처럼 느껴졌다.

"대기실에서 먼저 신원과 수술 부위를 확인하죠. 해당 수술에 필요한 기구와 장비 세팅이 끝나면 수술실로 이동해요. 수술실에서 마취에 앞서 환자의 신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러고 나면…."

머리맡에는 마취와 동시에 심박수와 혈압, 호흡, 산소포화도 등을 모니터링하며 환자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계가 놓여 있다. 수술대 위에는 머뭇거림 없이 수술이 진행될 수 있도록 각종 도구들을 배열해 둔 메이요 스탠드와 도구 테이블이 있다. 천장에는 대형 가마솥뚜껑만 한 무영등(無影燈) 두 개가 매달려 그림자나 눈부심 없이 시신경 피로를 최소화하면서 수술 부위를 장악할 수 있게 배치돼 있다. 거즈, 라텍스 장갑과 봉합사 등 온갖 소모품들, 부위별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른 칼날 세트들도 각양각색의 잿빛 스테인리스 도구들과 함께 멸균 공간의 벽을 따라 진열대 위나 진열장 안에 정연하게 갖춰져 있다. 장기의 절제와 봉합을 동시에 수행해 출혈과 수술 시간을 단축하게 해준다는 자동봉합기 등 고가의 정밀장비들도 순백의 코팅 에나멜로 외피를 치장한 채 신비로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수술실은 미지의 날카로운 것들이 지니는 전문성의 위엄과 기율로 무표정했다.

대개의 병원은 외벽과 의료진의 하얀 가운에서 보이듯 탈색된 무채색의 공간이다. 흰색은 순수와 순결의 권위를 상징하는 색이다. 하지만 수술복은 푸르거나 풀빛에 가까운 초록색. 수술 부위의 강렬한 붉은 기에 맞서 잔상 효과를 줄이고 시각 피로를 덜어주는 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피부 노출을 최소화한 초록의 수술팀은 그 신생의 빛깔로 생명의 붉은 기를 훼손하는 환부에 맞선다. 예닐곱 평의 수술실의 한 가운데, 한 평도 안 되는 그 컬러풀한 대치의 공간이 '수술 필드'다. 그 안에서 최소 두세 명의 집도의와 도구 담당 간호사, 소독 간호사가 환자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었다. 필드 바깥을 오가며 보조 역할을 담당하는 순환 간호사와 모니터를 통해 환자 상태를 점검하는 마취 간호사까지가 한 팀이다.

복도를 따라 강의실처럼 배치된 10여 개의 수술실은 빈 방이 없었고, 안팎을 오가는 수술복 차림의 의료진들 역시 분주했다. 하지만 수술실 내부 풍경에서는, 드라마에서 보던 긴박감보다는 일상의 절제된 움직임들이 주는 모종의 아늑함이 느껴졌다. 마스크와 캡 사이로 보이는 스텝들의 시선에서도 긴장의 머뭇거림이 아니라, 제 손놀림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들이 지니는 안정감이 엿보였다. 물론 크고 다급한 수술의 풍경은 다르겠지만, 저 만화 속 외과의의 말은 조금은 젠체하는 과장인 듯했다.

하지만 10m 남짓 너머, 회복실 출구 뒤에는 보호자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그들에게 짧게는 1시간 길게는 한나절 넘게도 걸린다는 수술시간은 피 밭는 고통의 시간이고, 집도의는 고대의 제사장이나 주술사- 그들은 실제로 의료인이기도 했다- 처럼 신을 대리해 생사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자다. 수술 결과에 따라 그들에게 의사는 생명의 은인도 되고, 극단적으로는 살인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의사는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여기겠노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의사에게는 진료 기술이, 의료 여건이, 상상력이, 저 모든 게 매개 없이 윤리가 된다. 3분 진료, 2분 진료라는 참담한 의료 현실은 그 자체로 히포크라테스 정신에 대한 훼손이다. 그리고 진실은 다양하고 그 진실들을 품고 사는 저마다의 가치관들은 더 다기하다. 그 가치들은 저마다 소중하지만, 때에 따라 저들끼리 맞서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의 말처럼, 저 근원적인 가치들의 모순적 대치를 해소해줄 명쾌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

의사는 백의의 천사(간호사에게 바쳐진 이 찬사는 1세기 전만 해도 전사들이 주로 남자였고 의사 역시 대부분 남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이고, 셰익스피어의 '티몬'이 그랬듯 살인자로 손가락질 당한다. 희곡 <아테네의 티몬> 에서 티몬은 "의사를 믿지 마라. 의사들이 주는 항생제는 독약이고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약전> 이라는 의학서를 번역한 니콜라스 쿨페퍼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사)에게 가서 가난한 사람의 집에, 치료 비용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의 집에 가자고 하면 그들은 가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가 사망에 이른 목적인 가난한 생명은 돈이 없는 죄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데이비드 우튼의 <의학의 진실> 에서)

당위적으로 보자면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최고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직업 윤리와 의료 자율권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국가(보건당국) 및 의료 자본과 갈등하고, 생활인으로서 응당 지녀야 할 책임 사이에서 동요하는 슈바이츠 컴플렉스의 존재들이어야 한다. 대치하는 그 가치들 중 손 쉬운 어느 하나와 편하게 타협하는 이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2000년 의약분업을 둘러싼 갈등으로 한국 의료 역사상 처음으로 단행된 의사 파업에 대해 당시 시민단체와 언론은 '생명을 볼모로 한 밥그릇 챙기기'로 그 싸움을 규정했다. 그 이면에는 의사들이 사회가 용인해준 것보다 많은 보상을 누리면서도 저열한 장삿속으로만 환자를 대하고 있다는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시민들의 진실 너머에서 의사들은 그들의 진실, 곧 시민의 건강권을 강화하고 안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그들의 파업을 정당화했다. 당시 의사협회가 주최한 한 심포지엄에서 어떤 발표자는 "사회가 의료인에게 보통사람과 너무 다른, 높은 수준의 윤리를 요구하지 않기를 간절히 호소한다"고 말했다.

파업은 1년 가량 끌다가 진정됐지만 성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급한 의료 현실은 손도 못 댄 채 봉합에 급급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제 '포괄수가제' 전면 시행에 반발해 의사들이 다시 수술실 문고리를 걸어 잠글 태세다. 정부의 의지는 10여 년 전과 다름없이 완강하고, 시민(단체)의 시선 역시 당위적 의료윤리의 범주 안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대치의 양상은 다르지만 구도만큼은 12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과 사가 은유가 아니라 현실로 타협 없이 마주 서는 그 멸균의 통제공간도 개별(집단)주체들이 감당해야 할 다양한 가치의 대치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볼모'인 시민들은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될 모양이다.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세상이 교과서적으로 당위의 동력만으로 굴러간 시절은 없었다. 거기에 대고 명분의 구호만 외쳐대는 것은 위선적이거나 무책임하다. 상상력은, 수술대를 마주한 의사가 아니라 국가와 자본,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시민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덕목인지 모른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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