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명이 근무를 하고 있는 대법원에서 법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대법관 13명뿐이다. 대법관만이 법복을 입고,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대법원 상고 사건 총 3만6,964건을 처리했다. 대법관 한 명당 하루 평균처리 사건만 8.4건에 달하는 살인적인 업무량이다. 과연 이들이 철인이라서 가능한 일일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조력자'가 있다. 하루 종일 사건 기록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그러나 판결문 어디에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이들. 바로 대법원 재판연구관들이다.
재판연구관은 누구
현재 대법원에는 총 114명의 재판연구관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 중 사법부 외부에서 선발한 8명을 제외한 106명이 현직 법관이다.
재판연구관은 지방법원 부장급 이상인 수석재판연구관이나 선임재판연구관을 빼면 고등법원 배석 판사와 같은 사법연수원 27, 28기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법관으로 임용된 후 하급심 법원에서 10년 정도의 재판 경험을 가진 이들이다.
재판연구원은 크게 '전속조'와 '공동조'로 구분이 된다. 전속조는 재판을 하지 않는법원행정처장을 뺀 12명의 대법관실에 소속돼 대법관을 보좌한다. 대법관 당 3명씩 총 36명이 전속조에 속해 있다. 공동조는 신건조와 심층조로 나눠진다. 신건조는 상고가 제기된 사건을 가장 먼저 검토하는 일을 한다. 대법원 내에서는 이들을 '문지기'라고 부른다. 검토 후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은 심층조로 보내고, 간단한 검토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은 상고 기각 등의 의견으로 대법관에게 보고를 한다. 심층조는 말 그대로 심층적인 연구와 법률 검토가 필요한 사건을 담당한다.
수도원 생활. '월화수목금금금'
신건조에 있는 한 재판연구관은 "주말은 물론이고, 연휴 때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휴가는 언감생심이다. 지난 2월 재판연구관으로 온 한 판사는 지금까지 출근을 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고 했다.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오는 사건을 두고, 연구관이 하루 자리를 비우게 되면 대법원 전체에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동조나 담당 대법관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하는 전속조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재판연구관 사이에서는 '탑돌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다. 공동조에 있는 한 재판연구관은 "보통 같은 조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사 후에는 대법원 건물을 함께 시계 방향으로 빙빙 돌면서 토론도 할 겸 휴식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유일한 오락거리이자, 사무실을 벗어나 하는 야외 활동인 것이다. 전속조의 한 연구관은 "하루에 점심, 저녁 두 바퀴씩 탑돌이를 하면, 문을 닫는 주말을 빼고 한 달에 40번, 1년에 480번 정도를 하게 된다"고 했다. 평균 2년 근무를 고려할 때 1,000번의 탑돌이를 하면 대법원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로 서로를 위로한다고 전했다.
법관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연구관은 동기 판사 가운데 20~30%만 갈 수 있는 자리로 알려졌다. 일은 고되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을 많이 다룰 수 있고 같은 선배 판사들의 연구 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장점 때문에 법관이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자리라고 한다. 한 재판 연구관은 "2년 정도의 연구관 생활을 마치면, 지방법원 부장으로 가는데 현장에서 재판을 할 수 있는 이론적인 탄탄한 자산을 마련하고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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