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맨이 유행시킨 것 중에 '적당히 좀 해라!' 는 말이 있다. 상대가 자꾸만 과도하게 장난을 치니까 처음엔 참고 있다가 결국 멱살을 잡고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면서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는다. 개그맨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장난치는 것이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면 과연 언제 멱살잡이가 나오면서 그와 함께 유행어가 튀어나올지 기대한다. 그러다 갑자기 멱살잡이가 시작되면 곧바로 웃음이 터진다.
한참을 웃고 있으려니 기분이 문득 묘해진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 그렇게 우스운 것이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적당히 하란 말은 늘 좋지 않은 이유로 쓴다. 물론 지금 같은 경우는 상대방이 너무 심하게 행동하니까 적당히 조절하라는 의미이긴 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적당히 한다는 것은 대충 한다는 의미로 쓰는 때가 많다.
회사 다닐 때 윗사람에게 가끔 이런 훈계를 받은 일이 있다. "그런 식으로 적당히 할 거면 아예 하지 마." 적당하다는 건 사전을 찾아 봐도 '충분하다, 알맞다, 꼭 들어맞다'처럼 긍정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무슨 일을 할 때 적당히 한다면 노력을 다 하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분에 넘치도록 노력하는데 익숙해진 탓이 아닐까.
사람마다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성격이나 습성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 좋다는 교육을 받았다. 다른 아기들보다 빨리 일어서서 걸으면 축하 할 일이고 말을 빨리 배우면 똑똑하단 인사치례를 듣는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다른 아이보다 시험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선생님께 칭찬 듣고 집에 가면 부모가 좋아한다. 부모는 아이가 또래보다 육체적 성장이 빠르거나 시험 성적이 좋으면, 하다못해 달리기라든지, 어떤 것이라도 뛰어난 것이 보이면 무척 좋아한다. 그때부터 아이는 자기 자랑거리가 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시험 성적표가 나왔을 때 한 개 틀리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백점 맞을 수 있는데 아쉽다.' 그러지 '잘했어, 한 개 밖에 안 틀렸네.' 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아이가 커서 제 스스로 공부할 나이가 되면 무엇이든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이 더욱 강해진다. 이때부터는 적당하는 것이 좋은 말로 쓰이지 않는다. 남들이 하는 만큼 적당히 공부하면 그저 그런 대학 밖에 못 간다는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듣는다. 어느 곳에 가든 그렇게 듣다보니 그걸 진실로 알게 된다. 그때부터는 무엇을 하더라도 적당히 할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직장에 다니는 이유가 분명히 '자아실현'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든 직장에서 적당히 일하면 그이는 승진에서 밀리거나 퇴출당하고 만다. 우리는 왜 적당히 일하면 안 될까? 왜 적당히 살면 안 되는 걸까.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쉬고, 텔레비전도 적당히 보면서 살면 좋지 않을까.
최근에 한 신문에서 마광수 교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즐길 줄 모른다고 한탄했다. '하루를 먹기 위해 열흘을 굶을 필요가 있느냐'는 말은 씁쓸한 여운을 남기지만 정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말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열심히 살고 있다. 열심히 살지 않고 적당하게 사는 사람은 게으르다는 눈길을 받는다. 모두가 한 길로 죽어라고 뛰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꿈이 다르고 닿고 싶은 목표도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이것을 이루며 사는데 모두 다 자기 능력을 넘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안 된다.
유학 경전 중 하나인 중용(中庸)은 바로 이렇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삶이 가장 떳떳하고 바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중용의 미'라고 하면 무척 좋은 말로 쓰지만 그와 똑같은 것을 우리말로 풀어서 '적당히 하는 것'이라 하면 나쁘게 생각한다. 이제부터 적당히 살자. 적당히 부는 바람, 적당히 따뜻한 햇살, 적당히 들풀이 자라난 동산을 상상해보면 안다.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란 걸. 이처럼 우리 삶도 다그치거나 괴롭히지 말고 적당하게 놓아주도록 하자.
윤성근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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