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피면 주위가 불 밝힌 듯 환해진다. 같은 봄 꽃이라도 살구꽃의 매력은 벚꽃과 다르다. 벚나무는 흔히 가로수처럼 무리 지어 꽃을 피우지만, 살구나무는 어느 집 마당 한쪽에 한 그루쯤 서 있기 마련이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고향의 봄> 노래가 일깨우듯 살구꽃은 고향의 정서를 표상한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 ) 살구꽃> 고향의>
■ 봄이 되어 아담한 초가 위에 뭉게구름이 일 듯 연분홍 살구꽃이 피어나면 아련한 그리움과 연정도 피어난다. 안도현의 <살구꽃> 처럼'내 마음 이렇게 어두워도/그대 생각이 나는 것은/그대가 이 봄 밤 어느 마당 가에/한 그루 살구나무로 서서/살구꽃을 살구꽃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꽃을 피우는 살구나무가 어려서 살던 고향 집 뒤꼍에도 한 그루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 꽃이 피었다가 언제 져버렸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살구꽃>
■ 봄은 갈수록 짧아져 꽃이 지고 살구가 나오는 시기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시고도 단 살구는 해소 천식 기관지염 치료에 좋은 한약 재료다. 마당에 살구나무가 있던 소설가 박완서씨는 '열매가 얼마나 예쁜지 수많은 열매 중 하나도 같은 것이 없어'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떨어진 살구를 다 주워 담곤 했다. 그는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은 것들을 살구잼으로 만들어 문인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살구잼 만들기는 이상하게도 지치지 않는 노동이라고 했다.
■ 우리 아파트 주변에도 요즘 살구가 많이 떨어져 있다. 박씨의 집과 달리 바닥이 잔디가 아니어서 온전한 게 적지만 오가며 살구를 줍는다. 그 살구를 먹으며 2주 전에 죽은 개를 생각한다. 개가 살구를 먹으면 죽는다던데, 그래서 한자로 '殺狗'라고 쓴다던데 6년 남짓 살았던 그 놈은 살구를 먹지 않고도 병으로 죽었다. 살구꽃 필 때 왔던 녀석은 가고 떠나 보낸 주인은 살구를 맛있게 먹고 있다. 그러면서 동물과 식물의 목숨, 어김없이 순환하는 자연질서를 생각한다.
임철순 논설고문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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