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들어선 남자는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더니 빈 자리를 찾아 앉는다.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가게 주인은 '어서 오시라'는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건네는 일이 없고, 남자 역시 누구의 시선과도 얽히기 싫다는 듯 고개 숙여 펴든 쪽지만 응시했다. 슬립(마킹용지) 서너 장을 쪽지 곁에 나란히 놓은 남자는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검정 사인펜으로 쪽지에 적힌 숫자들을 표시해 나갔다. 그는 지폐 한 장과 슬립을 건네고 주인에게서 받아 든 작은 종이를 영험한 부적이라도 되는 듯 양 귀 맞춰 접어서는 지갑에 넣고 문을 나섰다. 그가 그 공간에 머문 시간은 약 7분. 그 사이 그는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낭비하지 않았고, 먼저 와 있던 세 사람 역시 각자 철저한 개별자요 서로에게는 유령이었다.
서울 송파구 서민 상가와 주택가가 밀집한 동네의 한 로또방. 추첨이 예정돼 있던 지난 토요일(16일) 오후.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 공간 귀퉁이에 머문 2시간 남짓 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오갔지만 대화랄 만한 말이 오간 경우는, 커플로 보이는 한 젊은 남녀의 짧은 속삭임을 제외한다면 아예 없었고, 낡은 벽걸이 선풍기의 털털거리는 소음만 두 평이나 될까 싶은 공간을 떠다녔다. 눈을 가린 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갔다면 도심의 기도 공간이나 도서관쯤으로 오해했을 법한, 도심의 일상 공간에서는 만나기 힘든 적요가 그 공간 안에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공간을 찾아오는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물론 행위의 형식은 다르지만, 종교 제단이나 도서관 열람실에서 취직이나 학점 공부에 열중인 이들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듯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한때 가벼운 위악이나 냉소거리로 떠벌렸을 그 말이 얼마나 현실적인 말인지 뼈저리게 느껴봤음 직한 이들에게는 허황됨의 증거인 양 제시되는 로또의 당첨 확률이, 신의 구원이나 벼락출세의 가능성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믿음직한 것인지 모른다. 싸구려 종합비타민의 미네랄 함량만도 못한 확률이지만 0%와의 차이는 유와 무의 차이로 멀기 때문이다.
로또방 공간은 기도원이나 선승들의 선방과 같은 절제가 있다. 다양한 종류의 복권들이 놓인 자그마한 진열대 하나와 컴퓨터 모니터, 프린터가 카운터 비품의 다였다. 고객이 머무는 공간에는 빠듯하게 '맞고'나 칠 수 있을까 싶은 원형 탁자와 세 개의 의자. 창문 하나 없는 벽을 따라 'ㄷ'자 모양으로 두른 붙박이 책상과 군데군데 간이의자가 있었다. 일체의 장식도 없고, 선풍기를 제외하면 고객 편의를 위한 그 어떤 장비도 없는, 철저한 긴축의 기능 공간. 소위 자본주의 정신이라 불리는 것과 미니멀리즘 미학의 야합이 이룬 병적인 한 극단. 그 공간은 사람을 유혹하기보다는 서둘러 내몰기 위해 계산된 공간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주인과의 짤막한 인터뷰.
-다양한 사람들을 보시겠어요.
"비슷하죠, 뭐."
-어떻다는 얘긴지.
"돈 내고 낸 만큼 복권 받아 가는 거죠. 아무 말이 없으면 로또 달라는 거고, 또 대부분이 로또니까."
-유별난 경우도 있을 법한데.
"있기야 하지. 시계 들여다보며 타이밍 맞춰서 자동 주문 넣는 이들도 있고, 매일 두세 장씩 나눠 사는 단골도 있고…. 하지만 총알같이 들어와서 냉큼 나가는 이들이 많아요. 5초도 안 걸려."
-자동주문 아닌 경우는요.
"그 사람들 사정을 내가 어찌 아나. 뭐, 간혹 숫자로 빼곡하게 채운 노트를 들고 들어와서 펼쳐놓고 번호를 적는 사람도 있고, 계산기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일부러 눈 여겨 안 봐요."
국립남산도서관 서고에는 로또 당첨비법을 소개한 책이 무려 스무 권 가량 꽂혀 있는데, 누가 읽겠나 싶은 책들에도 묻은 손때가 장난이 아니다. <로또 당첨 이렇게> <복권 대박 비결> <이런 꿈을 꾸면 복권을 사라> <로또의 특성을 알면 대박이 보인다> <이야기 로또> …. "대박과 성공이 아름다운 것은 좌절과 고난이 존재하기 때문이니라"라는 저자의 어록과 '다음 카페 과학 인문분야 랭킹 1위'라는 글귀를 표지에 새긴 <백학도사의 로또비법 신서> 는 가히 신흥종교 입문서를 방불케 했다. 당첨번호들의 의미를 회차별로 해석해놓은 이 책의 머리말 한 구절. "어찌 진정한 믿음 없이 신서를 대하였느냐.(…) 제자들은 진정한 믿음과 마음의 눈으로 신서를 대하였는지 깨닫고 좌절과 고난은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거쳐가는 관문이니, 힘들어하지 말지로다." 백학도사의> 이야기> 로또의> 이런> 복권> 로또>
생년월일 등 운명적인 숫자들을 더하거나 곱해 번호를 도출하는 법, 1~45의 숫자별 의미들을 분석해놓은 비수학(秘數學), 기표된 점들의 도형을 분석한 도형테마서, 피타고라스 수열체계와 칼데아인들의 점성술까지 동원한 역술학자의 책, "복권과 룰렛 구슬은 양심도, 기억력도 없다"는 멋진 아포리즘을 새긴 번역서도 있다. 균형조합이론, 확률, 빈도, 상관계수, 다중선형회귀, 분포, 자연대수, 항아리모형 등 전문용어들이 빼곡한 수학자의 책도 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책은 꿈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동물의 상징을 로또의 숫자로 변환해주는 해몽서. 그 서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 자리를 잡은 프로이트는 그의 <꿈의 해석> 6판(1921) 서문에 이렇게 썼다. "과거에는 꿈의 본질을 해명하는 일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이 해명이 직면하고 있는 끈질긴 오해에 대처하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해졌다." 꿈의>
기획재정부 산하 복권위원회 홈페이지에는 고대 이집트와 진시황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복권의 유구한 역사에서부터 각종 관련 통계와 상식, 기금 배분 및 공익지원 사업 내역들을 홍보하는 글과 도표들이 친절하게 소개돼 있다. 한 마디로 '돈 벌어 좋은 데 쓰니까 즐겨 사시되, 과욕은 금물이다' 정도의 내용이다. 하지만 복권의 역사만큼 유구하지는 않아도, 복권의 위선과 꼼수에 대한 좌파 경제학자들의 고발도 못지않게 두툼하다. 대충 그들은 복권의 역사를 은밀한 수탈의 역사라 정의한다. 가난한 지갑을 터는 악질적인 역진세다, 부자에게 세금 더 걷어 해야 할 공익사업을 서민들 지갑에서 꺼내 쓴다, 지원 대상과 내역은 누가 어떻게 정하나, 국가가 허황된 꿈과 미신을 조장하고 불평등을 심화하고 불평등 체제를 정당화한다 등등. 이 논란(혹은 논쟁)은 복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승부 없이 이어져온 듯하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한 쪽에서 진지하게 상대를 안 하면 그만이니까. 존재의 긴 내력이 이미 선악의 심판을 회피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는 걸 테고, 당장 어마어마한 숫자의 서민들이 매주 열정적인 실천을 통해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옹색한 수세적 논리는 거꾸로 독점 도박사업의 주체인 국가가 서 있는 노골적인 계급(계층) 기반과 취약한 윤리적 토대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주 우호적으로 말하더라도 로또는 '필요악' 이상의 평가를 욕심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섬들의 심상한 풍경 안에 해적선 선장의 보물섬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카리브해의 물빛은 달리 보일 수 있다. 바쁜 출근길 건널목에 서자마자 켜지는 파란불을 하루치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운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로또는 그 너머의 행운을 넘볼 수 있게 해주는 드문 약속이다. 로또방의 삭막한 공간 안에는 엘도라도와 유토피아를 만들어낸 인간의 가망 없는 꿈이 동결 건조된 씨앗처럼 잠재돼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수학적ㆍ확률적 설명만으로는 설득되지 않을 깊은 맥락이 있고, 정치경제학적 비판만으로는 수긍하지 않을 끈질김이 있다. 서민들이 아예 몰라서, 속아서 로또나 복권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중팔구 오만이다. 그래서 작정하고 비판에 나선 이들이어도 사생결단의 각오로 덤벼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 사정 위에, 그 찜찜한 인정(人情) 위에 유서 깊은 국가의 파렴치는 기생하고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