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먹고 잠자고 사는 데에는 세도가도 없고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사는 남부 목멱산 아랫동네들이 좋으나 그 또한 타지 사람은 눈에 띄기 쉽소이다. 내 보기엔 중부에 있지만 태평방 어름이 적당할 듯하오. 거기 구리개 약전 거리도 있고 혜민서가 있으니 도성 밖에서도 아픈 백성들이 몰려오는 곳이며, 악공들의 장악원도 있고 선혜청이 가까워 지방 사람들도 볼일 보러 많이 오는 곳이라, 중인과 상민들에 하천들까지 잡색이 섞여 있는 동네라오. 내가 태평방에 아늑한 방 한 칸을 마련해 드리리다.
담배 한 죽 태우는 사이에 서일수의 입 떼기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방 구하기와 지인의 옥바라지 할 일 등도 자연스럽게 풀려서,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은 셈이 되었다.
아따, 너구리 피물 돈으루 술값 내려나? 연기 좀 고만 피워라 이놈들아.
주모는 삶은 돼지 뒷다리를 두툼한 나무 도마 위에 얹어서 소금과 함께 들여놓았고 칼이며 술잔이며를 던져 주고는 맨 나중에 잎사귀가 시퍼런 김치 한 사발을 상 위에 콱 내려놓으며 만복이에게 일렀다.
느이 애비 누이가 이렇게 늙마에 힘쓰는데 젊은 놈이 퍼질러 앉아서 받아처먹기만 하겠느냐? 술동이 좀 들구 와봐라.
고모 삼지 말구 장모 삼아야겠네. 그래야 술두 먹구 딸년두 먹지.
니가 제법 별장이랍시고 붉은 상모 전립 쓰고 으스대지만, 급료도 못 받는 터수에 누굴 먹겠다고? 이놈아, 밥심이 없으면 좆심도 가는 거여!
그래, 내 이 집구석에 외상 그은 적 있나?
계집질은 거저가 있어도 사내가 술로 빈대 잡으면 패가망신이지.
주모 아낙네가 엄지손가락으로 주욱 내리긋는 시늉을 하고는 돌아섰고, 김만복이는 한강 물 거슬러 떠먹으며 자랐다지만 입심에 당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술동이를 들고 왔다. 두툼한 비계와 살코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식칼로 듬성듬성 베어 소금에 찍어서는 시퍼런 김치 잎에 싸서 먹고 마시는데 그런 호협(豪俠)이 따로 없었다.
며칠 뒤에 김만복이 남대문 밖 주막거리로 나와 그들을 데리고 태평방으로 갔는데 약방이 몰려 있는 구리개 뒷골목이었다. 바로 지척에 숭례문 쪽으로 선혜청이 있었고 광통교를 건너면 서린 전옥서였다. 뒷골목은 약전의 살림집과 창고가 많은 곳으로 김만복이 안내한 집은 창고에 붙은 수직 방이었다. 커다란 자물통이 달린 나무 문짝 옆에 툇마루가 달린 방 한 칸이 달렸는데 약전의 곁꾼이 와서 판자 덧문을 열고 띠살문을 열자 제법 널찍한 방이 보였다. 비록 초가였지만 전체를 창고로 쓰는 곳이라 살림집이 아니라서 주인이나 안방에 내외를 가릴 필요도 없었으니 두 홀아비가 기거하며 드나들기에 편해 보였다. 김만복이가 어련히 잘 알아서 구했을까마는 위치도 적당했는데 다만 마땅히 취사를 할 데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그런 눈치를 알아챘는지 만복이가 방을 살피고 돌아서다가 말했다.
사내들이 찬거리 사들여다 밥 짓고 물 긷고 빨래하느니, 기생 서방이 되거나 주인을 정하는 것이 백번 옳지요.
늙수그레한 과수댁이 저녁에만 내외술집을 하는 곳이 명례방에 있었는데 김만복이 모셨던 선전관의 집이었다. 남편은 죽고 딸을 여윈 뒤에 과수댁은 자기 또래의 하녀와 함께 생계로 내외술집을 하는 한편 남별영의 군교들에게서 미포를 받고 밥을 붙여주고 있었다. 조촐한 기와집에 문간방이 두 칸 있어서 저녁에는 그야말로 팔뚝으로 통영반 술상을 들여주고 내가는 내외술집을 했고, 아침 점심으로 여염집 상밥을 팔았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한 달치로 미리 밥값을 내고 그 집에서 하루 두 끼를 대어 먹기로 하였으며 빨래도 맡기기로 정하였다.
거처할 집을 정하고 며칠 후에 서일수와 이신통은 피맛골의 한 주점에서 김만복과 그가 데려온 전옥서의 옥사정을 만났다. 옥사정은 검은 더그레를 벗고 테 좁은 흑립에 덧저고리를 걸치고 있어서 관원이 아니라 시정의 장사꾼처럼 보였다. 수염에 희끗희끗 흰 털이 보이는 것으로 그가 김만복보다는 나이가 십 년은 더 들어 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돌린 뒤에 서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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