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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왜 가난을 찍냐고? 거기에 휴머니즘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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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인터뷰] "왜 가난을 찍냐고? 거기에 휴머니즘이 있거든요"

입력
2012.06.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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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의 신문 판매원, 생선 비린내 나는 손을 뒤로 한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주머니, 길바닥에서 국수 한 그릇 허겁지겁 먹는 여자아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하나같이 궁핍한 삶 속에서 본능적으로 몸부림 치는 군상들은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화석처럼 다가온다.

영원한 현역 사진작가 최민식(84). 그의 카메라가 향한 곳은 삶의 끈을 붙잡고 꼬질꼬질하게 살거나 전쟁의 상흔을 안고 힘겹게 견디는 주인공들이다. 어두운 모습만을 찾아 다니다 보니 얻은 별명이 '거지 작가'였다. 1950년대를 거쳐 60, 70년대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사회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살벌한 군사정부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는 왜 이런 작업을 했을까.

"내가 그렇게 불우했고 가난했으며 비참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시장통에서 줄곧 자란 그의 눈에 띄고 부대끼며 살았던 그들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기록하고 휴머니즘을 얘기 하고 싶어한 듯하다.

"몇 년 전부터는 인도, 네팔에서 사진을 찍으니 '국제 거지작가'라고 하네. 허허. 그래도 난 상관없어요.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인간미를 찾을 수 있으니까."

그가 카메라를 처음 잡은 건 1957년. 근 55년간 카메라와 함께 인생을 걸어온 셈이다. 사진집 '인간'시리즈를 14집까지 냈고, 올해 하반기에도 단행본 두 권과 사진집 한 권의 출판을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 옥관 문화훈장, 대한사진문화상, 미국사진협회 우수상 등 10여 개의 국내외 사진상을 수상했다.

요즘도 여전히 걸으면서 셔터를 누르는 그의 반세기 넘는 사진 이야기는 역시 '가난'에서부터 시작됐다.

# 가난했기에, 가난을 찍는다

-가난이 평생의 테마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고향이 개성 옆에 있는 연백이야. 아버지가 소작농이었는데, 일곱 식구가 1년중 5개월은 죽만 먹고 살았어. 시골이라 다른 일거리도 거의 없었어. 지독한 가난 경험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게 했어요."

-사진 찍다 보면 안타까울 때도 많을 것 같아요.

"불쌍한 애를 찍으면 손에 돈을 좀 쥐여 줍니다. 배고프니까 받자마자 달려가서 풀빵을 사 먹더라고. 다큐 사진작가들은 유명세를 타려고 셔터 누르는 건 아니에요. '서로 나누자, 도와주자' 라는 호소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거죠."

-평안남도에 있는 일본 기업 미쓰비시에서 기능자 양성소에서 일하신 경험이 있네요?

"공부하러 갔다가, 고생만 하다 나왔지. 평안남도 진남포라고 있어요. 왜정시대에 중학교 2년 과정을 무료로 가르쳐준다고 해서 지원했는데 미쓰비시 군수공장에서 갖은 고생을 다했어. 2년 공부시켜주고 1년 6개월을 공장에서 죽도록 부려 먹은 거지. 오죽하면 가미가제 특공대 모집하길래 거길 가려고도 했다니까. 이후에도 지게꾼, 넝마주이, 군고구마 장수 등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일본에서 화가 수업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인쇄소에서 일하려고 디자인을 배웠어요. 그 사연도 영화 같아. 1955년도에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일본에서 공부하려고 부산에서 밀항했지. 일본 규슈에 하루 반 만에 도착했는데 같이 밀항한 16명 중에서 나랑 다른 한 명만 간신히 도망쳤어요. 난 몸은 허약했지만 6ㆍ25땐 참전해 청진까지 북진한 공로로 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았어."

-삶이 힘들면 사진은 사치로 여겨질 법한데.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 2년간 동경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했어요. 낮에는 식당이나 인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죠. 그러다 56년도에 헌책방에서 스타이켄(Eduard Jean Steichen)의 사진집 'The Family of Man' 을 봤어요. 전 세계 사진 20만 장 중에서 550점을 추린 사진집이었어. 그 책에 우리나라 사진도 넉 점이 들어가 있어요. 인간의 모든 애환이 사진집 한 권에 녹아 있던 거지. '이거 할 만하다'싶었지. 그 후론 그림 공부 접고 카메라 사서 독학했지. 57년도에 부산에 돌아오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하게 된 거지."

-촬영했던 이들의 사연은 좀 아세요? 외팔의 신문 판매원이라던가.

"잘은 몰라요, 옆에서 찍다가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한쪽 팔다리 없는 신문팔이 청년은 정류장에 버스가 서면 한발로 무척이나 빨리 달려가서 신문을 팔았어. 사람들이 안됐다며 대부분 신문을 사줬지. 그렇게 번 돈으로 변두리에 어머니하고 구멍가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휴머니즘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시는데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휴머니즘은 뭔가요?

"휴머니즘이라는 게 인도주의, 인간의 존엄성 이런 걸 의미하잖아. 도와주자, 나누자, 이게 전부지. 그러기 위해선 사진 속에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야 하고 감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느끼는 거죠. 사진은 찍는 순간 그 의미가 내 손을 벗어나거든. 감상자의 경험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는 거죠."

# 느낌 오면 머뭇거리지 않아.

-어떤 식으로 사진을 찍으세요?

"외국작가들은 비연출로 스냅사진(snap·속사)을 찍는데, 나도 그것이 사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연출은 아무리 잘해도 (보는 사람이)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느끼지 않으면 남들도 느낄 수 없는 거죠. 사진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원숭이가 찍든, 꼬마 아이가 찍든 물리적으로는 누가 찍어도 찍히거든요. 하지만 작품은 마음으로, 감각으로, 느낌으로 찍는 거에요."

-그럼 원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건가요

"기다린다기보다 지나가면서 표정을 보는 거지. 고구마 파는 한 아이가 얼굴만 내밀고 하품하는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 보고 있으면 한동안 고구마는 안 팔리고, 아이는 지루해하면 느낌이 오는 거지. '저 애가 곧 하품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보고 있으니 하품을 하더라고요. 제목을 '불경기'라고 했죠. 다큐멘터리 사진은 상상력, 관찰력을 모두 겸비해야 해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딜레마라고 할까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거냐, 셔터를 누를 거냐 하는 질문을 종종 받으실 텐데요?

"나는 수영을 못하니까 건지진 못하겠고.(웃음) 예전에 퓰리처상 받은 작품 중에 죽어가는 아이 앞에 독수리가 기다리는 사진 있잖아. 그 사진작가가 비난을 받아서 자살했지. 그 사람처럼 나도 찍을 거 같아. 그러고 나서 그 아이를 옮겨놓고 먹을 걸 챙겨주겠지. 사진이란 건 발견과 동시에 목숨 걸고 찍는 거라. 찍어야 남으니까. 번개처럼 찍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어."

-긴 시간 촬영하면서 쉰 적은 없으세요?

"사진집 '인간 1집' 만들고 1년 만에 울릉도에서 간첩이 잡혔어요. 그런데 간첩 소지품에 내 사진집이 있는 거야. 신문사에서 전화 오고 중앙정보부장도 몇 번 만나고 했지. 그 후론 사찰 대상이라 독일, 프랑스 여러 나라에서 사진전 초청을 받았는데 못 갔어. 한동안 여권도 없었으니까. 한참 뒤에 노태우 대통령때 가서야 여권을 받았지. 80년대 군사정권 때는 삼청교육대 교육 대상이었어. 시경에서 아는 후배가 전화를 하더니 명단에 있으니 도망가서 숨어 지내라고 하대. 일주일 뒤에 전화가 왔는데 삼청교육대 인원이 찼으니 돌아오라고."

-앞으로 꼭 찍어보고 싶은 사진은 뭔가요?

"아프리카 난민들 찍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곧 에티오피아를 가는데, 현지 대사관에서는 제발 비참한 모습은 찍지 말아 달라고 하던데 난민수용소에 가고 싶어. 이웃나라 수단에서 피난 온 사람들 백만 명이 천막치고 살고 있다고 하거든."

#돈, 시간, 작가정신의 트라이앵글이 중요해

-그동안 작업하신 작품은 속된 말로 '돈 되는' 사진은 아니었는데, 어려움이 많으셨겠어요.

"당시 필름이 그리 비싸진 않은데도 감당 못 할 정도였지. 그래도 우리 처가가 좀 부유해서 밥은 굶진 않았어요. 처남이 작은 공장을 운영하셔서 많이 도와주셨는데,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어려움을 크게 겪었어. 4년간은 필름도 못 사고 먹을 쌀도 없어서 아주 궁색했죠. 그런데 72년도인가, '구세주'가 나타나셨지. 경북 왜관에 베네딕토 수도원 분도출판사에 근무하시던 독일인 신부님이 내 사정을 듣고 연락을 해오셨어요. 수도원장님하고 의논해서 13년 동안 큰 도움을 받았어요. 당시 부산시 관광국장 월급이 3만 8,000원이었는데 매월 30만 원씩 지원받았으니까 굉장했지. 그 중 20만 원으론 사진 찍고 10만 원을 집에 생활비로 주면 집사람이 적금도 들고 애들 공부도 시키고 그랬죠. 월말에는 신부님께 사진 보여주고 합격하면 돈도 받고, 책도 출간돼서 아주 열심히 찍었어요. 내게는 정말 일생의 행운이었지."

-이후엔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셨나요?

"그 후론 대학강의, 출판, 도서관 특강 같은 거 하면서 근근이 유지하고 있어요. 책은 좀 많이 냈거든. 사진집 14권에 '사진 찍는 법'?관한 단행본을 다 합치면 총 36권 정도 되요. 올 가을에도 사진집 말고도 단행본 두 권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사진의 사상과 작가정신'에 대한 거거든. 요즘 포토샵 같은 걸로 사진에 장난을 치니까 안타까운 마음에서 쓴 책입니다. 다른 한 권은 사진과 글이 담긴 포토 에세이집이지."

-2008년에 국가기록원에 작품을 기증하셔서 화제가 됐습니다. 전 작품을 기증하신 건가요?

"집에 10만 컷 정도 더 있어요. 기증한 건 14만 컷쯤 될 겁니다. 앞으로 만권에 가까운 책과 카메라, 각종 원고도 기증할 겁니다. 시민들이 열람할 수 있도록 내 방을 하나 만든다더군요. 그래서 사진 아래 장소와 연도를 반드시 기록하죠. 그래야 다큐멘터리로서 역사적 가치를 갖게 되거든요."

-선생님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삼각대 위에 돈, 시간, 의식이 균형을 이뤄야 다큐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사실 그게 잘 안되죠. 셔터만 누르면 되니까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작품사진이라면 작가의 사상, 체험, 느낌이 없으면 안되죠. 작품사진과 일반사진의 큰 차이가 바로 내용이란 말이지."

이인선기자 kelly@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이수연 인턴기자(성신여대 국어국문 4년)

이소영 인턴기자(이화여대 도예 3년)

■ 사진작가 최민식의 ‘소년시대

미역 감으려고 모여든 벌거벗은 사내아이들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시대의 시름마저 삼킬 듯한 환한 표정에 관객도 미소 짓게 하는 사진이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인 사진작가 최민식씨가 포착한 유년의 모습은 가슴 벅차다.

전쟁과 가난, 정치적 격동기에 유년을 보낸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최민식 사진전_소년시대’가 내달 8일까지 서울 소공동1번지 롯데갤러리 본점에서 열린다. 소년을 통해 작가가 담아낸 시대의 창이자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바치는 경의다. 1957년부터 올해까지 부산 자갈치 시장, 광안리 해변, 영도 골목, 부산역 등에서 촬영한 사진 150여 점이 모였다. 이 중 130여 점은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이다.

가난과 격동기를 겪어낸 시대의 아픔을 카메라에 담아온 최민식 작가는 때로 비난이나 오해의 대상이었다. 혹자는 그가 ‘분노’의 눈으로 가난한 자들을 촬영했다고 하지만 이번 전시는 동시대인들에 대한 존중과 인간애를 오롯이 전한다.

5개 섹션으로 구분된 전시장에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엄마와 할머니의 시선, 우는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는 누이와 골목을 씩씩하게 누비는 골목대장까지 다채로운 시대의 표정이 담겼다. 그가 가장 아끼는 사진도 전시장에 나왔다. 자갈치 시장에 서서 젖을 물리는 아낙네의 사진이다. 젖먹이 동생을 업은 어린 누이와 생선 비린내가 날까 봐 손을 뒤로한 아낙의 모습 등 한 장의 사진에서 풍성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이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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