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 찔린 기분이다. 사람 눈조차 잘 마주치지 못하는 잔뜩 주눅 든 역할이라니. 윗눈썹을 실룩거리며 신라 왕실을 쥐락펴락하던 미실(드라마 '선덕여왕')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명분을 중시하는 당찬 여성 정치인('대물')의 모습도 찾을 수 없다. 심각한 공황장애에 시달려 외출도 삼가고, 중국집에 배달 주문조차 못하는 스크린 속 고현정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21일 개봉하는 '미쓰GO'(감독 박철곤)로 관객에게 의외의 즐거움을 선사할 고현정을 20일 서울 사간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고현정은 '미쓰GO'에서 500억원 분량의 마약거래를 둘러싼 암투에 우연찮게 휘말리는 여성 천수로를 연기한다. 마약을 차지하려는 두 폭력조직과 비리 경찰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건을 해결하며 오랜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는 역할이다. 이전엔 보기 힘들었던 고현정의 모습들이 맥락 없는 영화 속 소동극에 찰기를 준다.
조심스럽지만 솔직 담백한 말투로 고현정은 "천수로는 캐릭터의 다양화를 생각하다 고른 역"이라고 말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런 연약한 역할을 언제 또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망설임도 있었다고. "많은 분들에게 인식된 제 모습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질까 봐, 잘한다 잘한다고 하니 치기 어린 연기를 한다고 할까 봐"라는 우려가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제가 연기하면서도 너무 가증스러워 보여 '괜찮냐'며 감독님에게 매번 물었다"고 한다.
"'미쓰GO'로 영화 성인식을 치른 느낌이고 그래서 천수로는 너무 고마운 역할"이라면서 그는 "그동안 모정에 호소하는 내용 등 사생활을 연상시키는 영화의 출연을 피해왔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영화 해도 되는 나이도 됐고,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요."
영화 속 천수로는 폭력조직에 잠입한 경찰 '빨간 구두'(유해진)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대중들로선 고개를 갸웃할만한 내용이다. 고현정은 "천수로는 남자를 잘 모르니 그냥 자기 감정대로 바로 반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진은 어떤 연기에든 기승전결이 담긴 굉장한 분이라 사나운 면이 있을 줄 알았는데 굉장히 순둥이라 키스 장면 찍을 때 가슴이 떨렸다"며 상대 배우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미녀와 야수'식 사랑 저는 완전 동감해요. 살아보니 내용이 중요하더군요. 미스코리아 출신이 이런 이야기 하면 재수 없겠지만 여성들이여 정신 차리세요."
"영화 출연 제의를 많이 못 받는다"며 슬쩍 서운함도 내비쳤다. "아직까지 배우 소리를 못 듣는다"며 아쉬움도 드러냈다. "제가 이것 저것 잡다하게 많이 해서 그런지 방송인, 탤런트 소리만 들어요. 배우 소리 듣는 게 제 숙제이자 소망이에요. 뭔가가 연상이 안 되고 그저 배우로 불리면 참 행복할 듯해요."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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