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과거를 본 당일 퇴청 시간 직전에 장원과 급제자의 이름을 궁문 앞에 방으로 내걸어 발표하게 되어 있어, 시관들이 삼사만 장의 시지를 일일이 읽어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시지를 먼저 내야 유리하고 적어도 오백 장 안에는 들어야 작대기 비점이라도 받아본다는 형편이었다. 시관들은 먼저 글씨를 보아 서투르면 읽어볼 필요도 없이 작대기를 주욱 그어 버리거나 엇갈려서 가위를 긋고 비점을 주어 밀쳐 버리는데, 그렇게 쌓인 것이 수백 장이 되면 담당 관원이 짐 치우듯 내갔다. 몇 문장 읽었는데 또한 오자가 보이고 격식에 어긋나면 다시 작대기나 가위요, 좀 잘된 것은 동그라미로 관주를 치고, 그중 잘된 것은 겹동그라미 두 개로 알관주를 쳐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와 부와 책에 알관주 세 개만 받으면 합격인 셈이었다. 장원급제는 이들 알관주 세 개를 골고루 받은 자 중에서 다시 시관 모두의 알관주 셋이 겹친 여섯을 받아야 했고 최종적으로 정승의 낙점을 얻어야 했다.
문과에서 서른세 명을 뽑고, 생원 백 명, 진사 백 명을 뽑던 것이다. 대개 이들 서른세 명의 문과 합격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장원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생원 진사도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 확실한 직위라서 연줄이 좋으면 실직을 간혹 얻기도 하지만, 향리에 내려가면 지방 수령의 보좌역이나 자문 노릇을 할 수가 있었으며, 향소의 어른으로 또는 향교의 책임자로 행세할 수가 있었다. 소과의 초시만 하여도 군역이 면제되고 양반 대접을 받는데 하물며 진사 생원이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나 한가지였다.
일행은 아직도 사람으로 가득한 홍화문 앞을 빠져나와 누렁다리를 건너 지전이 늘어선 길로 내려왔고 때는 바야흐로 중화참이었다. 지전으로 들어서니 전방에 앉았던 주인이 일행을 맞았다.
그래, 샌님, 어떻습디까? 우리 접의 준비가 앞뒤 물샐틈없이 잘 되었겠지요?
하이고, 나 혼자 갔더라면 과장에 입장도 못 했을 거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난리굿일 줄이야.
김만복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진사는 따 놓은 당상이외다. 이분들의 실력과 솜씨라면 장원급제인들 왜 못 하겠소? 자아, 우리는 퇴청 시각까지 기다렸다가 방 붙은 연후에 다시 오지요.
만복의 말인즉슨 합격된 뒤의 뒷돈 사례를 잊지 말라는 다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서일수도 만복이와 한잔 생각이 있었는지 일어났다.
우리도 그때쯤 오겠소이다.
신통은 어젯밤부터 겪은 일을 돌이켜볼수록 엄청난 일인데도, 분노라든가 슬픈 감정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무엇인가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일시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일행들을 따라 배오개의 뒷골목 피맛골로 걸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허허 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시가 파장이 되자 한양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들끓던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고장으로 흩어져 갔다. 서일수와 신통은 제법 큰돈이 생겼는데, 이번에 상주서 왔다는 시골 선비가 진사에 합격되어 가문의 한을 풀었고 약속한 뒷돈도 주었던 터였다. 지전 주인에게 소개료로 각자 사십 냥 씩을 떼어주고도 백육십 냥이 생긴 셈이었다. 아마도 선비는 지전 소개료에 서수 대작과 접꾼들 동원 비용을 합하여 칠팔백 냥을 썼을 거였다. 그러나 수천 냥을 써도 운이 없으면 초시도 못 한다는 사례에 비하면 그는 그래도 천운을 만난 격이었다. 이신통은 그 하루 동안에 과거라든가 벼슬이라든가 하는 짓에 대하여 원래부터 마음에 없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포한과 원망의 뿌리가 남아 있었건만,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면서 시원하게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서일수의 언제나 유쾌하고 한 발 비켜서 있는 듯한 태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서 씨는 세태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거나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정 왈짜와 다름없이 아랫것들과 한통속이 되어 풍도 치고 능청스럽게 덜미도 잡으면서 휘돌아 나아갔다. 과시가 끝난 며칠 후에 신통은 서일수와 술을 마시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번 크게 웃고 나니 세상사가 바뀌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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