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007년 삼성전자에선 흥미로운 후계 대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포스트 윤종용'체제 경쟁. 장기집권 해온 윤 부회장이 물러날 경우 과연 누가 삼성전자의 수장이 될 것인가에 대한 경합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엔 두 명의 스타가 있었다. 황창규 반도체총괄사장과 이기태 정보통신총괄사장. 황 사장은 메모리 반도체기술의 새 지평을 연 '황의 법칙'의 주인공, 이 사장은 삼성전자 소비자 제품을 사상 처음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 정상에 올려 놓은 '애니콜 신화'의 주역이었다. 세간에선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윤 부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2년의 시차를 두고 두 사람은 차례로 고배를 마셨다. 대신 약간의 과도기(이윤우 부회장)를 거쳐 최종적으로 삼성전자 CEO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최지성 부회장이었다. 황ㆍ이 사장에 비하면 그는 무명이었다.
밖에선 의외의 인사라고 했지만 삼성 내부 얘긴 좀 달랐다. 우선 황ㆍ이 사장 같은 외향적 스타 CEO를 삼성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이에 비해 최 부회장은 판단력이나 추진력, 충성도 그리고 영업성과 면에서도 발군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TV부문을 맡아서는 난공불락의 소니를 격파했고, CEO 등극 후엔 애플추격 성공과 함께 삼성전자 창사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사실 의외성으로 따진다면 이번 미래전략실장 인사가 진짜 예상 밖이다. 삼성이 이 시점에 그룹 컨트롤타워의 사령관을 교체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최 부회장이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 부회장은 삼성의 '전형적'인 미래전략실장은 아니다. 역대 실장들의 면면을 보면 주로 재무나 기획, 인사파트 출신들이 많았다. 최 부회장처럼 직접 글로벌시장에서 세일즈를 하고 협상을 하고 마케팅을 했던 '현장'출신이 이 자리를 맡은 적은 없었다. 이학수ㆍ김순택 전 실장도 계열사 CEO를 맡다가 그룹 총괄사령탑에 임명된 케이스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기업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지금은 정치의 계절이다.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치러지고, 내년엔 새 정권이 출범한다. 재벌문제는 대선 쟁점에서 또 새 정부의 정책과제에서 최상위 의제가 될 것이고, 어떤 형태로든 삼성은 국내 최대 재벌그룹으로서 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만약 과거의 인사 패턴이었다면, 삼성의 미래전략실장은 '정무적 인사'가 맡았을 공산이 크다. 정치시즌에 맞게, 정무적으로 판단하고 정무적 대외관계를 갖고 있으며 정무적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그런 인물이 낙점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지성 카드'는 더욱 의외다. 어딜 봐도 그는 글로벌 시장 이미지이지, 정무형 캐릭터는 아니다.
이번 인사에서 '인사 그 이상의 뜻'이 읽혀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컨트롤타워에 재무ㆍ기획통 아닌 처음으로 현장통을 앉히고, 정치의 계절에 정무형 아닌 글로벌 시장 CEO를 택한 건 삼성에 큰 변화 바람이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삼성은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자식과 부인 빼고는' 거의 다 달라졌다고는 하나, 재무ㆍ정무 중시 마인드와 그런 인사패턴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특히 경영권 승계에 대한 지나친 재무적 접근, 각종 현안에 대한 과도한 정무적 해결시도가 삼성을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많다.
결국은 이게 다 시대변화의 산물이다. 재무적 관리도 정무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기업은 역시 시장에서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세계 1등 기업 삼성전자 지휘자가 그룹 사령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삼성전자가 삼성그룹다운 게 아니라, 이젠 삼성그룹이 삼성전자다워져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점에서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인사는 이건희 회장의 25년 경영을 통틀어 가장 획기적 사건이자, 장차 신경영 선언 이상의 대변혁을 몰고 올 수도 있다고 본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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