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가 몰려오고 일본제국주의에 굴복한 20세기초는 한반도에서 사상적 격동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인간의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면서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같은 자생신앙이 탄생했다. 이 가운데 원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실천윤리에 가까운 철학으로 주목을 받았다. 원불교는 전라남도 영광의 박중빈(1891~1943, 소태산) 대종사가 창시하고 경상북도 성주의 송규(1900~1962, 정산) 종사가 2대 종법사로 법통을 이어받아 이론을 정교화하면서 틀이 잡혔다. 영호남 갈등이 여전한 시대에 과거 영호남의 두 사람은 어떻게 의기투합했는지 들어보자. '정산종사 열반 50주기 기념전시회'가 열리는 전북 익산의 원불교 총본부를 찾았다. 소태산의 외손이면서 정산의 큰조카로 이곳 원로수도원에서 살고 있는 전 원광대 총장 송천은(76) 종사를 만났다. 그런데 원불교도에게 핏줄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걸 인터뷰 내내 확인할 수 있었다.
_대종사의 외손이고 정산종사의 큰조카이지요.
"대종사님은 아드님 두 분과 따님 한 분을 두셨는데 외동딸이 정산종사님의 일곱살 아래 동생(송도성 주산종사)과 결혼을 제가 태어났습니다. 정산종사님은 따님만 두 분이시라 아마 집안의 족보에는 큰형님이 양자로 올라갔다가 서울대 의대 다닐 때 독감에 걸려 돌아가시면서 제가 입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족보고 우리는 그런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
_교통도 좋지 않아 교류가 드물었을 그 시기에 어떻게 전라도 영광 사람과 경상도 성주 사람이 만났습니까?
"당시에는 젊은이들이 도를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님도 영광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도에만 관심을 쏟다가 마침내는 동네의 바위 아래 터를 잡고 큰 뜻을 깨우치게 되지요. 그래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친동생과 아저씨뻘인 친척, 동네 사람 등 8명을 제자로 정해 팔방의 역할을 맡기면서도 가장 중심은 나중에 사람이 올 것이다, 했거든요. 정산종사님은 성주의 양반인데도 유교가 아니라 다른 데에 도가 있지 않을까 해서 가야산 아래에서 수행도 하고 멀리로 도인을 찾아다녔다고 해요. 호남에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강증산도 만나고 그랬는데 열여덟살에 정읍 화해리에 머물면서 이적을 행하니까 제자가 40~50명이 생겼어요. 이때 대종사님이 하늘을 보고는 아저씨뻘인 제자 팔산종사에게 정읍 화해리로 가면 사람이 있다면서 그리로 가자고 하셨대요. 가보니까 정말 달덩이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대종사님은 키도 작고 피부도 검은데 정산종사님은 키가 6척에 가깝게 크고 피부도 아주 하?어요. 당시에는 정산종사님도 자부심이 있을 때라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밤새 이야기를 했는데 대종사님이 질문에 막히는 게 없는 거야. 그래서 '이분이시구나'하고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삼배를 드렸다고 해요. 당시에는 대종사님이 뜻은 높고 이뤄진 것은 없어서 (고민이 많다보니) 부스럼이 온몸에 나서 볼품이 없었는데도 알아본 거지요."
_그리고는 영광으로 따라가신 건가요?
"그 분만 간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온 집안 사람들을 데려갔지요. 집안 논 밭도 다 팔고.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혹세무민하는 사람을 만나서 양반 집안의 선비가 저게 뭐냐고 흉도 많이 들었다고 해요."
_그리고는 간척사업에 뛰어드신 건가요?
"방언(方堰)역사라고 하는데요. 대종사님이 하라고 하신 거지요. 대종사님의 위대한 점의 하나가 동네에서는 동정을 받을 정도로 불쌍한 처지였지만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거지요. 1918년이니까 측량기술도 없으면서 새끼줄 가지고 농민들 몇 명이 개간사업을 시작했는데 1년만에 2만 6,000평을 땅을 만들었으니 열 명이 얼마나 뭉쳤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게 성공한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원불교를 많이 따르게 되었어요."
_그런데 왜 영광에서 익산으로 본부를 옮겼어요?
"당시에는 여기가 이리였잖아요. 철도역이 있어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까 옮기신 거지요. 이상한 게 대종사님이 태어나서 성도하신 데가 길룡리인데 여기는 새 신(新)자, 신룡리란 말이에요. 저기는 미륵산이고 앞쪽은 용화산이고.(용화는 미륵의 한자어) 그러니까 주변에서는 '이게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리로 오신 痼甄? 이렇게도 말해요. 물론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하지시 않았어요."
_왜요?
"그 분은 굉장히 실천적인 걸 좋아해서 이적이나 신통한 것을 따르면 안된다고 하셨어요. 어느 정도 도를 닦으면 신통력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에 빠지면 오히려 잘못되는 것이라 보셨지요. 제가 어렸을 때도 신통을 얻기 위해 팔을 자른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뭘 물어보면 막히는 것이 없는데도 대종사님은 높이 평가를 하지 않았어요. 신통력이 아니라 원만구족의 정신을 깊이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어요."
_원불교는 이름을 봐서는 불교의 한 분파로 시작하신 건가요?
"그 분은 앞선 종교의 좋은 것은 모두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불교와 상관은 없습니다. 불교 경전 하나 읽지 않고 홀로 깨달으신 분이니까요. 깨닫고 나서 다른 경전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나 알아보려고 불경도 성경도 살펴보니 석가모니불이 성인중의 성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셨다고 해요. 금강경을 읽으시고 '내가 스승없이 깨달았으나 이미 이 분이 미리 깨치셔서 써놓았다'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을 함께 강조하고 인과신앙 해탈 극락을 믿고 대자대비를 실현하자는 것은 비슷하지요. 그러나 정산종사님을 절에 보내 제도를 알아보라고 하시면서도 경전은 절대 읽지 못하게 하셨다니까요. 왜냐하면 정산종사님은 한문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불경을 자유자재로 읽을 경우 오히려 깨달음의 세계에서 오는 영감이나 지혜력을 놓칠까봐 걱정하신 거지요. 대종사님은 공부도 거의 못하신 분인데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한시 300수를 팔산정사님에게 불러줬다고 해요. 아마 불교를 붙인 것은 일제시대에 종교탄압을 피하자는 뜻도 있지 않나 싶어요."
_간척사업을 한달지 저축조합을 만들어서 성실하게 살라고 권한달지 원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실천조합 같은데요.
"사상과 수행을 함께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겠지요. 불교도 원래 부처님은 중도사상을 강조했는데 그 후 출세간(세상을 떠나 수도)주의를 강조하게 되었지요. 반면 원불교는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여기서 수행하는 것을 강조하고 중도라는 것도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 시대에 유익하고 건설적이고 창의적이고 모두에게 혜택이 된다면 중도라고 봐요. 처처불상(處處佛像) 세상 모든 것이 불상이고, 사사불공(事事佛供) 모든 일이 불공이다 그러지요. 시대에 유익하고 생활에 유익하고 대중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한다. 또 전체불신앙, 전체불공이라고 해서 일반인 속에도 부처님 요소가 있다고 보는 거에요. 내가 남을 부처처럼 공경하고 대할 수 있다면 그런 노력이 바로 영성개발 아니냐. 내 자신에 대해서도 잘못된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잘못은 고쳐야 되지만, 내 안에도 부처님 같은 요소가 있다는 걸 믿고 그걸 늘 생각하고 기뻐하면 그게 영성개발 아니냐. 마가복음에도 그런 게 있다고 하더군요. 거지를 나와 똑같이 대접하라. 원불교는 일원상 진리라고 해서 영원의 진리와 돌고 도는 변화의 진리가 하나이고 근본과 궁극은 일치하며 모자람과 남음이 없는 원만완성을 강조합니다. 저 사람이 나쁠 수도 있지만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걸 믿는 거지요. 일원상은 가운데가 텅 비어있잖아요. 진리가 텅 비지 않으면 만물을 이렇게 만들어낼 수 없다. 일원상의 진리는 영원한 진리를 믿고 돌고 도는 진리를 믿는 거에요."
_불교는 힌두교의 계급을 타파했는데 원불교도 당시 계급과 성별을 타파하려고 했습니까?
"그렇지요. 유교의 계급을 타파하셨으니까요. 양반들도 모두 몸으로 일하게 하셨어요. 남녀차별문제도 이미 대종사님 살아계실 때 수위단(최고성직자단)에 남녀수를 동수로 했습니다. 이건 당시 세계 최초가 아닐까요? 제가 입고 있는 법복도 교역자만 입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교도도 다 입을 수 있습니다."
_그래도 아직 여자는 결혼하면 교무(원불교 성직자)를 할 수 없게 되어있다는데요.
"논의는 많이 하고 있어요. 재정능력이 없어서 유보된 상태이지 교리상으로 금하고 있지는 않아요."
_외할아버지로 대종사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여기는 탁아소를 일찍 만들어 모두 공동육아를 했기 때문에 나만의 외할아버지다, 이런 건 없어요. 아침에 애들이 다같이 안부 인사하러 가면 벽장에서 과자를 하나씩 주시던 생각이 나요. 당시 익산 총부 안에 일본경찰의 주재소가 있었어요. 이게 순수한국인 단체니까 감시를 한 거지요. 주재소에는 황이천씨라고 한국인 순사가 있었는데 대종사님한테 감동을 받아 나중에는 심통제자가 되었어요. 이 분이 원래는 황가봉씨인데 대종사님이 두 하늘을 살게 될 것이라고 이천으로 이름을 고치라고 했대요. 이미 일본 지배가 끝날 것을 알았던 거지요. 제자들이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려 하면 일본 망한다고 말렸대요. 모든 법회 시작에는 일본 경찰이 지키고 앉아서 황국신민의 선서를 하게 되어 있는데 대종사님은 늘 그게 끝나면 들어오셔서 어린 마음에 이상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를 안 다녀서 일본말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걸 안 하셨다고 해요."
_어머님은 어떤 분이었어요?
"어머님은 교역자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눈에 병이 생겨서 결혼을 했어요. 결혼하실 적에 대종사님이 신정예법을 만드셨어요. 대종사님은 생일잔치니 제사 같은 걸 다 쓸데없는 행사가 많다고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위도 독실한 신자니까 원불교 역사에 남는 결혼을 했어요. 아버님이랑 정산종사님이 영산성지를 돌려서 다니니까 출장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겠다 해서는 새마을운동 하듯이 옷을 빨아 입고 그렇게 결혼을 했어요. 예물로는 옥비녀만 하나 꽂아주니까 옥비녀를 내동댕이치고 싶었다고 해요.(웃음) 지금도 원불교에서는 대각개교절(소태산종법사가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날 4월 28일)에 모든 축일을 함께 기념해요. 저도 결혼기념일이니 생일이니 따로 지내본 적이 없어요."
_큰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치밀하신 분이지요. 제가 외지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하자 밖의 사람도 불러들일 때니 안으로 와서 공부하라고 하셨어요. 삼동윤리를 세우실 때는 사무실로 오는 사람마다 설명을 하시더니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니까 반포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_평소에 수행은 어떻게 하십니까?
"일 없을 때는 돈망(頓忘), 일이 있을 때는 선용(善用) 하려고 해요. 일이 없을 때는 쓸데없는 생각에 얽매여서 잠을 못자거나 몸을 버리거나 자기를 괴롭히거나 하지 않고 활동할 때는 생각도 말도 행동도 자기 힘껏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 말고 더 있겠어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