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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령 2만호 특집/ 하종오 사회부장이 독자께 드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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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령 2만호 특집/ 하종오 사회부장이 독자께 드리는 글

입력
2012.06.1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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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라."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여러 금언들 중에서도 이 말만큼은 언제나 가슴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보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팩트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캐내고 검증한 앙상한 사실의 뼛조각들이 종내 거대한 의미의 산을 이룰 것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1970년대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소설 의 작가 조해일의 신춘문예 등단작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는 잊어버렸지만 그 소설의 첫 문장은 기억에 생생합니다.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소설 주인공은 영화 엑스트라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로지 죽어가는 연기 하나로, 그야말로 매일매일을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일간신문 기자도 저는 매일 죽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매일매일 마감에 쫓기면서, 하루가 곧 인생 전부인 양, 승부를 걸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1면 톱 특종기사를 써서 온 대한민국이 온 세계가 내 것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다가도, 내일 상대지에 1단짜리 기사로 물을 먹으면(낙종을 뜻합니다) 살 맛이 안 나는 게 기자의 속성입니다. 반대로 눈에 띄지도 않는 지면 한 구석에 박힌 1단짜리 기사라 해도, 그것이 내가 발로 뛰어 발굴하고 가치를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한 보석같은 기사라면 그 기자는 혼자 남몰래 세상을 품에 안은 듯한 뿌듯함을 느낄 겁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하루살이는 아닙니다. 건조한 팩트의 전달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작은 팩트에서 사회 변화를 짚어내고 역사를 움직이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신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들이 편가르기 하듯 보수니 진보니 확연하게 갈라져 버렸고, 사실마저 내 편 입맛대로 선택하고 심지어 편견에다 사실을 억지로 갖다 맞추기까지 하는 것이 한국의 언론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그런 편가르기식 보도를 지양합니다. 사회와 역사의 차원에서, 국민 전체의 알권리와 권익만을 기준으로 기사가치를 판단하려 합니다.

한국일보가 표방하는 중도(中道)가 때로 보수도 진보도 좌도 우도 아닌, 선명하지 못한 기계적 중립으로 비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손쉽게 편을 갈라놓고 시작하기보다, 이슈마다 국민인 독자의 편에서 엄혹하게 검증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최근 기억나는 한국일보의 빛나는 기사 몇몇만 봐도 그렇습니다. 6개월 이상의 끈질긴 취재로 SK그룹 횡령 사건을 특종 보도했습니다. 작은 제보에서 시작한 물밑 취재로 현 정권 최고 실세로 불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사퇴하는 계기가 된 비리 사건을 1면 톱 기사로 과감하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정치 경제 권력의 비리와 이면을 감시하고 파헤치는 것만큼, 한국일보는 평범하고 움츠리고 소외된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비리를 고발하는 만큼 희망을 발굴하고 키워가려 합니다. 지난해 연재한 '대한민국 복지의 길을 묻다' 등 대형 기획은 물론, 매일 사회면에 빠트리지 않고 실으려고 노력하는 화제ㆍ미담 기사는 그런 관심의 발로입니다. 좀 더 신명나고 살맛나는 세상을 그런 기사로 함께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기자 출신인 작가 고 이병주가 말했던 '역사의 성긴 그물이 놓쳐버린 인간 군상의 삶'이야말로 신문이 반드시 기록해야 할 또다른 역사라고 믿습니다.

오늘 한국일보 지령 2만호는 그런 하루하루로 이룬 산물입니다. 창간 후 58년 동안 우리의 선배, 동료, 후배 기자들이 하루하루 피 말리며 독자 여러분과 함께 뛰어온 기록입니다. 한국일보가 우리 사회, 한국 현대사와 함께 숨쉬며 쌓아온 의미의 산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20만호, 200만호까지 갈 거라면 욕심일까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신생 미디어가 출현하는 시대에 신문의 위기, 종말을 운위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결코 신문은 사라지지도 위축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신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커질 것이라고 낙관하는 쪽입니다. 물론 신문이 과거의 파워나 영광에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일시적 유행이나 이익을 좇는 여타 미디어와 신문은 다릅니다. 어떤 다른 미디어도 신문을 대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다한 꿈과 유혹 뿌리치고 신문기자 되겠다고 한국일보의 문을 두드리는 우수한 인재들의 눈빛에서 저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매일 죽는 사람의 길을 자청한 그 젊은피에게 저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그냥 기자(記者)가 아니다. 기운 기(氣) 자, 기자(氣者)가 되어라." 독자 여러분께는 2만호 한국일보에 더 힘찬 기운 불어넣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더 좋은 신문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팩트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해라."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여러 금언들 중에서도 이 말만큼은 언제나 가슴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보태 후배들에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팩트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캐내고 검증한 앙상한 사실의 뼛조각들이 종내 거대한 의미의 산을 이룰 것이다."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매일 죽는 사람> 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1970년대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소설 <겨울여자> 의 작가 조해일의 신춘문예 등단작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는 잊어버렸지만 그 소설의 첫 문장은 기억에 생생합니다.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소설 주인공은 영화 엑스트라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로지 죽어가는 연기 하나로, 그야말로 매일매일을 죽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일간신문 기자도 저는 매일 죽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매일매일 마감에 쫓기면서, 하루가 곧 인생 전부인 양, 승부를 걸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1면 톱 특종기사를 써서 온 대한민국이 온 세계가 내 것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다가도, 내일 상대지에 1단짜리 기사로 물을 먹으면(낙종을 뜻합니다) 살 맛이 안 나는 게 기자의 속성입니다. 반대로 눈에 띄지도 않는 지면 한 구석에 박힌 1단짜리 기사라 해도, 그것이 내가 발로 뛰어 발굴하고 가치를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한 보석같은 기사라면 그 기자는 혼자 남몰래 세상을 품에 안은 듯한 뿌듯함을 느낄 겁니다.

그렇다고 기자들이 하루살이는 아닙니다. 건조한 팩트의 전달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작은 팩트에서 사회 변화를 짚어내고 역사를 움직이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신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들이 편가르기 하듯 보수니 진보니 확연하게 갈라져 버렸고, 사실마저 내 편 입맛대로 선택하고 심지어 편견에다 사실을 억지로 갖다 맞추기까지 하는 것이 한국의 언론 현실입니다. 한국일보는 그런 편가르기식 보도를 지양합니다. 사회와 역사의 차원에서, 국민 전체의 알권리와 권익만을 기준으로 기사가치를 판단하려 합니다.

한국일보가 표방하는 중도(中道)가 때로 보수도 진보도 좌도 우도 아닌, 선명하지 못한 기계적 중립으로 비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손쉽게 편을 갈라놓고 시작하기보다, 이슈마다 국민인 독자의 편에서 엄혹하게 검증하고 판단하려 합니다. 최근 기억나는 한국일보의 빛나는 기사 몇몇만 봐도 그렇습니다. 6개월 이상의 끈질긴 취재로 SK그룹 횡령 사건을 특종 보도했습니다. 작은 제보에서 시작한 물밑 취재로 현 정권 최고 실세로 불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사퇴하는 계기가 된 비리 사건을 1면 톱 기사로 과감하게 올릴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정치 경제 권력의 비리와 이면을 감시하고 파헤치는 것만큼, 한국일보는 평범하고 움츠리고 소외된 우리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비리를 고발하는 만큼 희망을 발굴하고 키워가려 합니다. 지난해 연재한 '대한민국 복지의 길을 묻다' 등 대형 기획은 물론, 매일 사회면에 빠트리지 않고 실으려고 노력하는 화제ㆍ미담 기사는 그런 관심의 발로입니다. 좀 더 신명나고 살맛나는 세상을 그런 기사로 함께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기자 출신인 작가 고 이병주가 말했던 '역사의 성긴 그물이 놓쳐버린 인간 군상의 삶'이야말로 신문이 반드시 기록해야 할 또다른 역사라고 믿습니다.

오늘 한국일보 지령 2만호는 그런 하루하루로 이룬 산물입니다. 창간 후 58년 동안 우리의 선배, 동료, 후배 기자들이 하루하루 피 말리며 독자 여러분과 함께 뛰어온 기록입니다. 한국일보가 우리 사회, 한국 현대사와 함께 숨쉬며 쌓아온 의미의 산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20만호, 200만호까지 갈 거라면 욕심일까요. 하루가 다르게 각종 신생 미디어가 출현하는 시대에 신문의 위기, 종말을 운위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결코 신문은 사라지지도 위축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오히려 신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더 중요해지고 커질 것이라고 낙관하는 쪽입니다. 물론 신문이 과거의 파워나 영광에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일시적 유행이나 이익을 좇는 여타 미디어와 신문은 다릅니다. 어떤 다른 미디어도 신문을 대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다한 꿈과 유혹 뿌리치고 신문기자 되겠다고 한국일보의 문을 두드리는 우수한 인재들의 눈빛에서 저는 그것을 확인합니다. 매일 죽는 사람의 길을 자청한 그 젊은피에게 저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그냥 기자(記者)가 아니다. 기운 기(氣) 자, 기자(氣者)가 되어라." 독자 여러분께는 2만호 한국일보에 더 힘찬 기운 불어넣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더 좋은 신문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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