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재계의 거물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김순택 삼성 부회장(미래전략실장),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 강유식 LG부회장, 김영태 SK사장.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이 동반성장에 대한 재계의 협조를 촉구하기 위해 마련한 4대 그룹 대표 간담회였다. 하지만 시선은 김 위원장보다 이들 4대 그룹 대표들에게 더 쏠렸다. 간담회 주변에 있던 한 관계자는 "그야말로 별들이 다 모였다. 이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재벌그룹의 넘버2.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 바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최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에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이 임명되면서 이들의 역할과 위상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엔 어디나 2인자가 있다. 오너를 둔 총수체제,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체제의 독특한 산물이다. 이들은 오너를 보좌하면서 대행하고, 그룹전체를 조율하고 지휘하는 그룹의 '컨트롤 타워'이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2인자들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보면 된다. 하나는 그룹 전체의 현안을 챙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너 개인과 관련된 업무들을 매끄럽게 처리하는 것이다. 힘이 실리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룹마다 2인자에도 특징과 색깔이 있는데, 가장 파워풀한 곳은 역시 삼성이다. 삼성그룹의 2인자인 미래전략실장은 그룹의 인사 재무 감사 기획 법무 등 모든 분야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사령관'에 비유된다.
삼성의 2인자들은 전통적으로 재무 혹은 기획통들이 맡아왔다. 하지만 새로 선임된 최지성 실장은 삼성전자CEO 출신의 현장전문가다. 삼성관계자는 "지금까지 미래전략실장(혹은 비서실장)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인 만큼 미래전략실, 나아가 삼성그룹 전체에 상당한 변화가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이맹희씨와의 유산분쟁, 그리고 향후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으로의 경영권승계 작업완료도 최 실장이 풀어가야 할 복잡한 현안들이다.
삼성의 미래전략실장이 '사령관'스타일이라면 LG는 특유의 조용한 기업문화 탓에 2인자도 '조정자'에 가깝다. 한 재계인사는 "삼성은 계열사 보다 그룹(미래전략실)쪽으로 힘이 집중되는 데 비해 LG는 반대로 계열사 쪽에 힘이 실리고 그룹(지주사)의 영향력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LG에선 강유식 ㈜LG 부회장이 1997년부터 무려 15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요 그룹 2인자로선 최장수이다. IMF때는 빅딜 협상을 담당했고, 창사 이래 최대위기를 맞았던 카드사태도 해결했으며, 무엇보다 두 오너인 구씨(현 LG)와 허씨(현 GS) 일가의 분가를 잡음 없이 매듭지었다. 한 회사관계자는 강 부회장에 대해 "절대로 소리 나지 않게 일하는 가장 LG다운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직접 대표이사도 맡고 경영 전체를 챙기기 때문에, 원래 두드러진 2인자가 없었던 게 특징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 그룹에는 다른 그룹과 달리 10명이 넘는 부회장들이 있다. 어떤 의미에선 모두가 2인자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2인자가 하나도 없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현대차그룹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워낙 글로벌 사업규모가 커지는데다, 경영권승계나 지배구조개편 등 풀어야 할 현안들이 많아지고 있어 2인자의 존재가 절실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현대차그룹의 2인자는 종합기획실을 맡고 있는 김용환 부회장이다. 아이디어 뱅크로 통하는 그는 '정 회장의 분신'이라는 말을 듣는다.
SK그룹은 2인자의 위상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손길승-조정남으로 이어지던 '중량급 2인자'의 맥은 끊어진 상태. 한 재계원로는 "최태원 회장이 경영을 처음 맡았을 때에는 손길승 회장 같은 거물 조력자가 필요했지만 이젠 최 회장 직접경영을 하기 때문에 2인자의 위상은 사장급으로 하향됐고 역할도 크게 축소됐다"고 말했다. 이 임무는 현재 김영태 사장이 맡고 있다.
5위 재벌 롯데그룹은 신격호 총괄회장도 그렇고, 신동빈 회장도 그렇고 모두 친정 스타일이라 2인자의 역할이 아주 파워풀하지는 않고 대외적으로 노출도 적다. '리틀 신격호'로 불리는 이인원 정책본부장(부회장)이 2007년부터 이 자리를 맡고 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유인호기자
■ 삼성의 역대 2인자들
국내 최대기업 삼성의 그룹 컨트롤타워는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로 이름이 바뀌어 왔다. 비서실이란 이름으로 첫 탄생한 1959년 이후 거쳐간 인물은 총 13명. 이 중에는 10년 이상 장수를 한 실장도 있는 반면 5개월도 못 버티고 물러난 경우도 있다.
가장 전설적인 비서실장은 고 소병해 실장이다. 1978년8월년부터 90년12월까지 무려 12년을 재임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 때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이건희 회장 때까지 2대에 걸쳐 2인자 역할을 해왔다. 삼성출신의 한 인사는 "소 실장은 면도날과 같은 사람으로 무엇보다 기억력과 분석력이 탁월했다"고 회고했다.
삼성 비서실이 막강해진 건 소병해 실장 때이다. 그는 비서실을 기존 인사 외에 재무, 감사, 기획 기능까지 거느린 강력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고 이병철 회장에서 이건희 회장으로 경영권이 승계되는 힘들과 복잡한 과정을 '연착륙'시킨 1등 공신이란 해석이 있는 반면 '도'를 넘는 권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 내에선 "이건희 회장조차 그를 부담스러워했으며 그를 배제시키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란 얘기가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고 소병해 실장보다 더 막강한 비서실장은 이학수 실장이었다. 1997년1월부터 2008년7월까지 11년 반 동안이나 이 자리를 지켰다. 고 소병해 실장이 이병철 회장의 '복심'이었다면 이학수 실장은 이건희 회장의 '분신'이었다. 당시는 이건희 회장이 지금처럼 사옥으로 출근하지 않고 한남동 자택(승지원)에서 보고 받고 지시를 내리던 터라, 사옥 안에선 이학수 실장이 1인자였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전형적인 재무통으로서 IMF 위기를 넘겼고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끌어올렸고, 무엇보다 경영권 승계정지작업부터 대정부ㆍ정치권 관계까지 온갖 궂은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의 권한은 지나치게 비대해졌고, 김용철변호사의 폭로와 특검으로까지 이어졌던 투명성 문제를 방치ㆍ악화시켰다는 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기도 한다. 경영복귀 후 과거 공백기간 동안의 업무를 세세하게 파악한 이건희 회장이 이학수 실장을 경질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권력형'이었던 소병해ㆍ이학수 두 실장을 빼면, 다른 비서실장들은 대체로 무색무취한 '관리형'이었다. 소병해 실장의 뒤를 이은 이수빈 실장은 1991년2월~93년10월까지 비교적 단명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 계열사CEO로 승승장구, 현재까지도 삼성 내에서 이건희 회장을 빼곤 유일하게 회장 타이틀(삼성생명 회장)을 갖고 있다. 이수빈 실장의 후임이었던 현명관 실장(1993년10월~96년12월)은 이례적으로 공무원 출신이었다. 이학수 실장의 후임으로 미래전략실 초대실장을 맡았던 김순택 실장(2010년11월~12년6월) 역시 관리ㆍ기획형으로 분류된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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