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 철원 / 이현 지음 / 창비 발행ㆍ쪽ㆍ1만2,000원
이 이야기는 '어느 날, 한 노인을'(279쪽) 만나며 쓰였다. 민통선 너머에서 농사를 짓는 노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조선인민공화국, 미군정 통치하에 있었고, 이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작가는 그 노인에게 '분단의 장벽 아래 묻혀 있던 이야기'(280쪽)를 들었고, '도둑처럼 찾아왔다던 광복의 그날, 이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의 꿈을 복원하기로 한다.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연설로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우리 조선은 감격적인 광복을 맞았습니다."(56쪽)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찾아온다. 삼팔선 북쪽의 철원에서는 공산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새 세상이 펼쳐진다. 양반집 계집종으로 살던 경애는 광복 전에는 말도 못 걸었던 양반집 딸 은혜와 같이 서점에서 일하며 광복 후의 삶을 시작한다. 집을 되찾고 헤어졌던 작은언니와도 재회한다. 경애는 경성 출신의 모던 보이 제영, 경애의 우상이자 광복의 상징인 홍정두 등과 함께 시끌벅적한 나날을 보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던 어느 날, '철원애국청년단'이라는 집단이 잇달아 테러를 일으킨다. 철원은 공포에 휩싸이고 사람들은 동요에 빠진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경애, 기수, 제영은 월남을 결심하고, 경성에 와서 철원애국청년단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은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철원애국청년단과 은밀히 접촉한다.
경애 일행이 경성에 머문 사이, 철원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광복의 상징이자 경애 일행의 우상인 홍정두가 철원애국청년단의 손에 살해된 것. 철원으로 돌아온 경애 일행은 홍정두의 죽음에 절망하지만 도리어 살해 용의자로 체포되고 만다. 경애와 기수의 추리로 진범이 밝혀지지만 이들의 마음 속에는 공허만이 가득하다. 홍정두의 장례식 전날 밤, 아직 잡히지 않은 철원애국청년단이 유치장에 폭탄을 터뜨린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은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다시 꿈 같구나'(17쪽). 일제시대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번안, 소개된 '희망가'를 통해 조국의 희망과 불안을 노래했던 인물들은 광복 후 갈등과 반목을 겪으며 '나의 희망은 무엇이냐'(375쪽)를 되묻는다.
작가는 광복 전후 한반도 혼란을 노비출신 경애, 공산주의자 도련님 기수, 양반집 딸 은혜, 모던 보이 제영 등 다양한 인물들의 계급적 위치에서 재현한다. 교육문제, 학교폭력, 세대갈등 등 세태 고발이 주를 이루는 국내 청소년소설 시장에서 드물게 내놓은 역사소설로 당시 백화점과 커피숍이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대도시 철원의 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렸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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