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대선을 치른다면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00만여 표 차이로 질 수도 있습니다."
지난달 중순 재계를 대표하는 유력 경제단체의 고위 인사와 가진 식사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얘기한 '박 전 위원장 패배론'의 대략적인 근거는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지만 범보수와 범진보의 득표수에선 범진보가 약간 많았다는 점, 역대 대선 투표율이 총선보다 높고 박 전 위원장이 열세인 2040세대의 투표율이 크게 증가한다는 점, 미묘하고 복잡한 세대·지역별 표심 흐름 등으로 기억된다.
'다양한 대선 시나리오와 분석 중의 하나'라는 전제를 깔긴 했지만 지금 한참 잘나가는 박 전 위원장이 당장 치르는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분석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내세운 근거들도 이미 총선 이후 대부분 언론에 소개됐던 것으로 새로울 게 없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식사 자리 객담으로 흘려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몸담고 있는 조직 때문이었다. 재계 특히 대기업들의 정보력은 막강하다. 총선이 끝난 뒤 유수의 여론조사기관과 언론의 출구조사도 맞추지 못했던 총선 결과를 몇몇 대기업은 정확히 예측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 대기업들의 정보가 모일 수 있는 조직이었다. 또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 보수를 대표하는 박 전 위원장의 패배를 예측한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박 전 위원장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총선에서 빈사 직전의 새누리당을 이끌고 승리를 일구어낸 찬란한 전과에 따른 전리품이다. 여론조사기관들의 조사에서 꾸준히 지지율 40%대를 유지하며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또 당내에서 '친박계와 친이계'라는 계파 구도가 사라졌다. 19대 새누리당 당선자의 70% 이상이 친박계로 분류된다. 5·15 전당대회를 전후해 당 대표와 원내대표, 사무총장 등 핵심 당직을 친박계 의원들이 차지했다. 당 최고 의결기구인 최고위원회 멤버 9명 중 8명이 친박계 의원이고 19대 국회 전반기를 이끌 국회의장 후보도 친박계 인사로 결정됐다.
더욱이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한 종북 논란과 북한의 잦은 위협으로 안보 정국이란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마당에서 박 전 위원장이 진다는 말은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이 정신 나간 소리가 왜 나올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박 전 위원장은 비박 대선주자들의 완전국민경선제 요구에 대해 지난 4월23일 "경기 룰을 보고 선수가 거기에 맞춰 경기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한 뒤 50일이 넘게 경선 룰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대선 주자들 간의 룰 협상을 위한 경선준비위도 생략하고 경선관리위원회 출범을 강행했다. 역대 어느 정당과 정권에도 없던 독선독주이다. 김문수 경기지사,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 의원이 경선 보이콧 검토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분당'이니 '정계개편' 등의 얘기가 거론되기 시작하고 있다.
새누리당이 깨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박 전 위원장이 치명적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이미지는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데 그가 오랜 기간 쌓아온 '원칙과 신뢰'의 긍정 이미지가 '독선과 오만'의 부정 이미지로 바뀔 수 있다.
박 전 위원장으로선 경선 룰 변경을 받아들였다가 패배한 2007년 경선 상황이 재연될 수 있는 어떤 변화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현재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지지율 2~3%를 넘지 못하는 경쟁자들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얼음공주'와 '불통'의 이미지가 강화될 수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이미 2002년 한나라당 경선 때 당시 1등 주자인 이회창 대표에게 룰 변경을 요구했다가 좌절되자 탈당한 전력도 있다. 때문에 경선 룰에 대한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원칙' 이미지는 탈색될 뿐이다. 그리고 그의 침묵은 박 전 위원장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에서도 '박근혜 패배론'이 고개를 들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동국 정치부 차장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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