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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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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3. 집을 버리다 <55>

입력
2012.06.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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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험 문제가 내걸리는 현제판(懸題板)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문제가 내걸리자 마자 혼잡이 심하여 제목만 베끼려 하여도 자기 차례가 오도록 기다려야 하니 헛된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만복이가 두둔해야 할 접의 물주들은 선비 세 사람이었는데 접꾼이 모두 열 명이었으니 세도가들을 제외한다면 시골 선비들로서는 체면이 서는 편이었다. 자리다툼이 벌어지는데 너무 좋은 자리에는 처지와 형편을 살펴가며 자리를 잡아야 했으니 먼저 차지했다 할지라도, 어느 댁 도련님이 행차하시면 위세당당한 가노들이 불문곡직 세워둔 장막을 찢고 말뚝을 뽑아 던지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두들겨 패서 쫓아버리는 것이다. 김만복이가 두리번거리며 뛰다가 마당 두번째 줄의 안쪽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나아가서 사초롱 등을 장대에 달아 올렸다. 득달같이 달려온 접꾼 패거리들이 일제히 가져온 말뚝을 박고 베를 둘러 장막을 치니 앉으면 안 보이고 일어서면 배에 닿을 만한 높이였다. 또한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거자가 앉을 자리 앞에 지전에서 가져온 두툼한 종이 서판을 놓으니 준비가 모두 끝났다. 서일수가 어둠 속의 너른 마당이 등불과 장막으로 거의 들어차고 있는 것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어째, 좀 구석진 것 같은데……

이쯤이 좋소이다. 공연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가 해 뜨고 나서 세도가 행차라도 뜨면 사정없이 쫓겨나오. 그러면 그때쯤엔 저어기 담장 밖의 채마밭으로 가서 과장 안으로 다시는 못 들어오게 되지요.

어떻게 이리도 형편을 꿰고 계시우?

서일수가 묻자 김만복은 아직 얼이 빠진 채 숨을 고르고 앉아 있는 선비들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싱긋 웃고 말했다.

과시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큰돈을 만져볼 대목 중의 대목입니다. 시골 양반들 한을 풀어주니 우리도 좋은 일 하는 셈이지요.

그리도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그래 무과라도 한번 해보지 그랬소?

서일수는 일부러 말을 시키듯 한번 까짜올려 보는 것이었는데 만복이 그를 바라보며 역시 어르는 듯 되받았다.

배오개 지전에서 서수 거벽으로 내세웠다면 한번 응시해볼 만한 분은 왜 이러고 있나요?

그야…… 쓰러질 나무에 새둥지 틀 일 있소?

날지 못할 새는 아니시구?

두 사람은 서로를 희롱하다 껄껄 웃어버렸다. 유산을 펴고 앉은 선비들은 피곤에 겨워 앉은 채로 졸고 있고 접꾼들도 돗자리 귀퉁이에 앉아 있거나 다른 자리의 안면 있는 자들과 어울려 시끌벅적 떠들어대는데 장터와 다를 바 없었다. 해가 뜨고 새끼 그물로 막아놓은 안쪽에는 높다란 삼층 단이 차려 있고 그 위에 거대한 차일이 펼쳐졌는데 아래로는 시관들이 앉을 자리와 책상이 가지런히 놓였다. 먼저 수직 군사들이 들어와 열을 지어 벌여서는 품이 곧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졸고 있던 선비가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접꾼들을 향하여 물었다.

오늘 임금님께서 친림하는가?

아니외다. 식년시라 삼정승 중의 한 분이 나오십니다.

이신통이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장막 위로 고개를 빼고 사방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곧 시작하는 거요?

아직 멀었소. 아침 요기라도 해야지요.

좌중의 사람들은 접꾼들의 말에 어쩐지 잊고 있다가 더욱 시장기가 돌면서 속으로 그렇지 아침은 먹어야지 하고들 생각하였다. 신통이 더욱 궁금하여 다시 묻는다.

헌데 예서 무슨 수로 아침을 먹는단 말요?

기다려 보십시오. 다 수가 나게 되어 있습죠.

또한 한참을 기다려서 해가 높직이 뜬 시각에 수십 명의 남녀가 머리에 광주리 이고 등에 지게를 지고서 홍화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장막과 장막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접꾼들은 그들을 부르고 여기 먼저 오라고 외치고 그런 소란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누렁다리며 배오개 인근에서 온 장사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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