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채널을 돌리다 <대한뉴스> 등의 옛 영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모습을 보게 되면 왠지 가슴이 짠해진다. 왜 안 그렇겠는가. 취학 전부터 20대 장정이 될 때까지 줄곧 우리의 삶과 의식을 지배한 군주였으니까. 그 긴 세월 매일 도처에서 그의 얼굴과 목소리 속에서 컸으니 그는 아예 우리 세대의 성장환경이었다. 대한뉴스>
그래서 그가 홀연히 스러지고 난 뒤에도 대통령 직함 앞에 붙은 다른 이름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의 공과에 대한 숱한 논쟁과 시대적 고비를 거쳐 우리사회가 그의 유산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또 필요했다. 그렇게 길고도 힘겨운 과정을 넘어 극복했던 박정희가 그런데, 다시 돌아오고 있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가 "(수구꼴통의)'7인회'가 박근혜를 움직이고 있다"고 공격한 게 시발이 됐다. 물론 실제로 이들이 적극적인 자문활동을 하거나 과외교사 역할을 한 흔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건 아직 없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과거 활동경력이 널리 상기된 것만으로도 공격효과는 컸다. 구시대 이미지 탈색이 가장 큰 숙제인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힘든 반 발짝 행보가 순식간에 되돌려졌다.
박근혜 지지를 표방하며 속속 결집하는 외곽조직에도 유사한 인물들이 속속 참여하고 있다. 10년 만에 돌아온 보수정권에서 섭섭하게 소외됐던 과거인사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초기 MB진영에 참여한 인사들이 대체로 과거와는 거리를 둔 신세대 실무형 보수였던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지난달 말의 행사에선 5공의 실세였던 이가 "민족중흥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며 "박 대통령을 닮은 새로운 국가지도자를 간절하게 보고 싶다"고 사자후를 토했다는 전언(傳言)도 있다.
때맞춰 새누리당에서는 "새마을 정신과 새마을운동 확산에 더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한구 원내대표의 뜬금없는 발언이 튀어나오고, 앞서는 친박계로 분류되는 한기호 의원이 공식적으로 규정된 5ㆍ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되돌리는 주장으로 숟가락을 얹었다.
박 전 위원장은 지난해 말 "(성장위주의) 거시지표보다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더 필요하다"고 선언한 뒤 고용, 복지 등에서 야권을 당황시키는 진보적인 약속들을 쏟아냈다. 그래도 국민들의 대선주자 이념성향 인식에선 여전히 가장 오른쪽이다. 뭘 해도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쉽게 바꾸지 못하게 하는 배경은 역시 아버지 박정희다. 이런 판국에 주변의 박정희 복고 움직임은 그야말로 자해(自害)다.
'박정희의 딸'은 박근혜에게 축복 아닌 족쇄다. 박 전 대통령은 거의 모든 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건 그 시대의 박정희에 한한 것이다. 경제측면에서도 박정희식 발전모델은 이미 87년 체제로 효용성을 다 했고, 97년 IMF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해체됐으며, 그 97년 체제도 이제 임계점에 와있다. 이런 시대에 국가동원과 획일규제를 근간으로 하는 박정희를 향수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시대착오가 아니다.
박 전 위원장이 아버지에게 배울 게 있다면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 정도일 것이다. 미래발전을 위해 뭐가 필요한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이다. 그 시대적 안목이 머물 곳은 지금은 아마 복지, 균형, 원칙, 정의 등 대개 그런 가치들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다른 대선주자들에 비해 박근혜는 아무리 조심해도 까딱하면 한 순간에 퇴행적 이미지로 추락할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 물론 너무 큰 아버지 그림자 때문이다. 진취적이고 전향적 이미지로 죽어라고 포장을 해대도 모자랄 판이다.
그러니 수명 다해 제 소리도 안 나는 낡은 옛 노래 LP판을 주변에서 말끔히 치우지 않으면 박근혜에게 승산은 없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갈길 바쁜 이 시기에 또 과거나 붙들고 진흙탕 싸움질로 세월을 허비할 나라 꼴이 심히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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