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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고급예술을 미워하면

입력
2012.06.1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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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예술은 상류층, 있는 자들의 향유물이다. 소수의 그들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쓰고, 예술단이 활동하고, 공간을 내어주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다. 대중적인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하고, 공연 공간 역시 그것을 위해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그럴듯하다. 수억 원을 들여 화려한 무대를 만들고, 외국 유명 지휘자를 불러와 비싼 관람료를 받고 일부 부유층에게만 관람 기회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다소 수준이 떨어지지만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체험하고 즐기는 수요자 중심의 대중적 문화예술로 가자는 것이다. 좋게 말해 문화에서의 복지이고, 문화예술의 향유권 확대이다.

그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세종문화회관에 고급예술이 사라졌다. 세계적인 공연의 초청도 거의 없어졌다. 산하 예술단들은 품격 있는 공연을 내놓지 못하고, 그나마 어렵게 완성해 놓은 같은 작품도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4월 공연예정이던 오페라 와 지난 달 무대에 오르기로 한 뮤지컬 도 예산을 줄이는 바람에 연기돼 세종문화회관은 사실상 개점휴업상태다(본보 11일자 14면 보도).

창작무대 공연을 포기한 예술단들은 대신 서울시 25개 자치구 문화예술회관 순회공연에 나서야 한다. 시민과의 소통과 공공성 확대를 위해서라고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 취임 후 새로 임명된 사장의 방침이다. 그곳에서 그들이 보여줄 공연이란 게 뻔하다. 수억 원을 들인 고급 작품이나 공연일 리는 없다. 기껏해야 기존 레퍼토리 일부를 대강 엮은 것이거나, 무늬만 고급 흉내 낸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의 공연은 자치구 자체의 기획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렇게 중국의 하방(下放)과 같은 봉사에 시간을 다 허비하면 언제 작품다운 작품을 만들고 공연하겠는가.

오세훈 시장 시절에도 세종문화회관은 그랬다. 수익성을 위해 식당이나 크게 열고, 잡다한 전시성 공연과 이벤트를 남발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지금도 세종문화회관은 고급예술을 팽개친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그나마 대중적 인기 야외공연으로 자리잡은 까지도 사장의 취향으로 한쪽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민중 미술가의 작품에 내어주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잡다하게 벌여놓은 공연과 전시들을 보면 이곳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인가 싶을 정도다.

법인화 직후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여온 서울시립교향악단도 상황이 비슷하다. 서울시의 지원은 줄었고, 시장은 품격 있는 공연보다는 시민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벌써 5개월째 공연조차 못한 채 같은 법인화의 길을 가고 있는 KBS교향악단도 어쩌면 생존을 위해 고급예술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을지 모른다. 어디에서도 고급문화와 예술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렵다. 누구도 그것의 가치와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정부는 산업논리에 매달려 '한류'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정치권은 문화예술에조차 어설픈 복지 포퓰리즘에 빠져 고급예술에 접근도 않으려 한다. 한강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짓는 것마저 전시성 토건사업으로 몰아 백지화시켜 버렸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고급 문화예술의 실종이 아니다. 지난해 '대국민 문화향수 현황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 대부분이 고급예술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향유권의 확대를 위해 예술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국민을 위한다는 이유로 예술의 하향 평준화와 억지 대중화를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평등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다.

고급예술에서 대중예술이 나오고 역으로 대중예술에서 고급예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대중예술 못지 않게 지적 만족과 미적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과 그것을 위한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술의 생명력과 자부심도 생긴다. 문화 복지는 국민 모두가 그것을 누릴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에서만큼은 계층적 사고와 이념적 편향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예술이 산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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