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이 교육 분야에서 열어놓고 있는 가장 위대한 민주적 가능성의 하나는 교육에 접근할 기회의 대폭 확장이다. 대표적으로 사이버 교육과 원거리 학습은 아닌 게 아니라 국내외 굴지의 교육센터들을 내 방으로 끌어들인다. 민주주의는 배제의 정치학 아닌 '포함'의 정치학이다. 누구에게나 교육 받을 기회를 주고 그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사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교육적 이상이다. 이 이상의 바닥에 깔린 기본 '어삼션'(생각)은 교육의 영역에서 특권의 울타리를 제거하고 '최대 다수에게 최대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할 사회적 지름길이 된다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교육기회라는 민주적 이상은 그렇게 해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사회철학과 멋들어지게 결합하고, 디지털 하이테크는 이 결합을 중매하는 축복의 기술이 된다.
디지털 기술이 교육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또 다른 부분은 그 기술의 도움을 최대로 활용할 때 '교육효과'가 엄청스레 높아진다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는 모든 교육 종사자들의 항구한 화두다. 교육에 투입되는 각종 노력들이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최대의 '아웃풋'을 낼 수 있게 하자는 것도 교육의 이상 가운데 하나다. 디지털 기술이 그런 교육적 이상의 실현에 크게 기여한다는 주장은, 그 주장의 실증적 증거 유무를 떠나 디지털 시대가 퍼뜨리는 복음의 하나다. 그래서 디지털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멀지 않아 대학 같은 것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 하이테크의 교육적 기여를 예찬하는 열광적 박수소리는 이미 도처에서 귀가 따갑게 들려오고 있다. 그 박수소리에 묻히고 눌려서 들려오지 않는 다른 소리는 없는가. 특히 한국에서. 디지털 기술시대의 교육이 하이테크의 행진 앞에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들,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심각한 문제들은 없는가. 교육이 제기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들은 없겠는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검토해봐야 할 위험하고 근거 박약한 '디지털 시대의 통상적 어삼션'들은 없을 것인가.
우선, 학생들의 신음소리가 있다. "교수님, 제가 이 글꼭지를 열 번이나 읽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대학 신입생 하나가 읽기교재에 실린 열 쪽도 안 되는 글 한 편을 읽고 (사실은 버둥거리다) 와서 털어놓는 소리다. 한국인이니까 한글로 된 텍스트를 읽기는 하는데 도무지 의미 파악은 안 되는 경우다. 진정한 의미의 '문해력'이 길러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신음도 있다. "한 단락을 읽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면 앞에서 뭘 읽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요." 조지 오웰의 풍자우화 에 나오는 얘기 같다. 농장의 말 두 마리가 '알파벳'을 깨치느라 애쓰는데, ABCD까지는 간신히 깨치지만 그 다음 EFGH 넉자로 넘어가면 앞에서 공부한 ABCD가 생각나지 않는다. 교육은 실패한다. 기억력의 위기다. 기억력은 암기의 능력 말고도 집중력을 필요로 하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의 저장창고로 이송해서 갈무리하고 그렇게 저장된 정보를 필요할 때 인출하는 뇌신경 작업을 요구한다.
나는 지금 수많은 관찰 사례들 가운데 단 두 개만을 든 것에 불과하다. 이런 사례가 디지털 기술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깊은 관계가 있다. 디지털 기술시대의 '원주민'을 자처하는 젊은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환경 속에 태어나 자라면서 정신분산을 강요하는 과잉자극과 과잉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사고력,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이 파탄에 가까운 위기를 만나고 있다.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훨씬 비싼 댓가를 요구한다. 지적 정서적 능력의 결손, 자기를 만들고 형성해가야 하는 성장기 교육의 위기, 넓고 깊게 지식의 토대를 닦아야 하는 시대의 생존의 위기로 나타난다. 이런 위기로부터 탁월한 개인, 책임 있는 민주시민이 길러질까. 디지털 시대의 교육 종사자들은 밤을 새며 해법을 찾아야 할 문제들 앞에서 고민이 많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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