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도 저격수가 등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다. 정치권의 재벌개혁 압박에 항상 수세적 자세를 취해왔던 재계는 최근 들어 강경 공세모드로 전환했는데 그 총대를 한경연이 매고 있는 상황이다.
한경연은 지난 주 토론회를 열어 정치권 재벌개혁주장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경제민주화'개념을 전면적으로 반박했다. 헌법에 명기된 경제민주화 조항을 사실상 폐기하자고 까지 요구했다. 정치권에선 '한경연의 도발'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재계에선 '한경연의 활약'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최병일(사진) 한경연원장은 10일 본지 인터뷰에서 "1년 여 동안 변화를 준비해왔고 이제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경연은 '재계의 싱크탱크'를 표방하며 1991년이 설립됐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존재감이 부각되지 못했다. 특히 작년 말 이후 재벌개혁압박 국면에서도 한경연은 '대체 하는 게 뭐가 있나'는 눈총을 받아왔다.
최 원장은 이에 대해 "작년 말 취임한 이후 2012년이라는 정치 공간을 중요하게 봤다"며 "(정치권의 재벌 때리기 공세에 대응하지 않았던 건) 성숙한 담론과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하는 과정에서 한경연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젠 내부정비도 끝나고 본격적인 토론과 논의를 해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해 경제민주화 이슈를 제기한 것"이라며 "총선에서 경제민주화에 대한 많은 얘기가 나왔고 19대 국회도 열린 만큼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경연이 벤치마킹하는 모델은 미국 헤리티지 재단. 1973년 설립돼 뛰어난 정보력과 분석력을 바탕으로 정책입안자 학자 언론 등에 가장 시의적절한 보고서를 제공하고 있다. 보수성향의 헤리티지재단은 진보성향의 브루킹스연구소와 함께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로 평가 받고 있다. 일각에선 한경연을 미국 보수파의 이론적 근거지인 미국기업연구소(AEI)와 연관시키고 있지만, 한경연 관계자는 "부시 행정부 때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요새'로 불리며 극우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져 더 이상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와 관련, "경제를 기본으로 두고 국제적 이슈와 공공정책 등 좀 더 큰 담론을 포괄하는 연구소로 거듭나는 게 목표"라며 "조만간 사회통합과 관련한 별도 기구를 세우는 것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경연의 변신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 시각도 많다. 정말로 건전한 보수연구기관이 되려면 먼저 대기업 이익대변기관의 흔적부터 씻어내야 하는데, 전경련 산하기관이란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장은 "한국의 대기업 집단은 담합이나 부당한 내부거래 등 시장경제 원리에 반하는 행위를 많이 하는데 한경연이 이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관계자도 "국회 개원에 맞춰 경제민주화 이슈를 제기하는 것부터 스스로 재벌 대변 연구기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회원사의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의견개진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재정적 독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경연은 전경련 소속 120개 대기업(이사회원사)가 내는 별도회비로 운영된다. 이에 반해 헤리티지 재단은 30만명이 넘는 풀뿌리 개인회원이 예산의 95%를 담당하며, 나머지 5%만 기업 후원으로 받고 있다. 작년부터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한경연 부회장을 겸직, 한경연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더욱 후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 원장은 이 같은 우려에 대해"전경련 유관기관이라는 점이 특별히 활동에 제약을 주는 것은 전혀 없다"며"삼성경제연구소 등 기업부설 연구기관과 KDI 등 국책연구기관보다 더 진영논리에서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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