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과 관련한 기사를 작성할 때만큼 기자의 실력이 탄로나는 경우는 드물다. 민감한 북핵 기사를 처음 다루던 때 이 사안에 일찍 천착했던 동료 기자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북핵 공부를 시켜달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솔직히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북핵이 국가 안위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고 취재기자에게도 상당한 사전지식이 필요하지만, 20년 넘게 쳇바퀴 돌듯 하는 이 문제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기자의 전문성을 찾는 게 좋았을 거란 얘기였다. 어쩌면 기자에게 실패의 교훈만 남긴 북핵 공부는 다른 분야와 비교해 시간낭비일 수 있다는 평가도 내렸다.
실제 외교와 정책에서 북핵에 따른 기회비용을 살펴보면 아쉬움이 더 클 수 있다. 미국 워싱턴에서 그 같은 경우를 목격했다. 4월 13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워싱턴의 한반도 이슈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할지에 모아졌다.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나 정책 결정자들은 근 2개월 동안 한국 취재진의 유사한 질문에 답해야 했다.
동전 던지기 같은 문제의 해답이 얼마 전 북한에서 나왔다. "우리는 핵실험을 예정한 일이 없다"는 발표였다. 이런 진지한 촌극이 벌어지는 동안 한반도 이슈들이 북핵에 가려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중 하나가 개정시한이 2014년인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문제였다. 지금껏 개정 협상에서 한국은 핵 발전에서 나오는 사용 후 연료를 재처리할 권리를 요구하고 미국 정부는 거부해왔다. 1956년 체결돼 73년에 개정된 이 협정이 미 핵 기술 제공의 근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핵무기 제조 금지는 물론 핵 비확산조약(NPT)이 허용한 합법적 핵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까지 자발적으로 포기토록 제한했다.
그러나 모두가 북핵에 몰두해 있는 사이 미국 내 기류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공화당이 주류인 미 하원에선 한미동맹 격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다. 도널드 만줄로 하원 외교위 산하 아태소위원장은 일본은 할 수 있고 한국은 할 수 없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청문회까지 열어 미 정치권에 한국 지지 여론을 조성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사전동의를 받아 연료봉 제조 등 상업적 차원의 핵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활동 권한을 부여받았다. 매년 700톤 가량의 사용 후 연료가 나오는 한국은 조만간 저장시설이 동이 나 일본에 돈을 주고 재처리를 맡겨야 할 처지다.
미국이 이렇게 한국을 차별하는 것은 바로 북핵 때문이다. 한국에 핵 재처리를 허용하면 북핵 협상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건 굳어진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 측 협상 당사자들마저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며 제쳐놓은 사이 미국은 스스로 해법을 찾고 있었다. 미 원전업계는 일자리 창출과 시장 확보를 위해 한국에 재처리 권한을 주자고 한다. 전세계에 민간 핵 원자로는 현재 66기가 건설 중에 있고 160기는 계획 또는 발주 단계에 있다. 다음 10년 동안 핵 원자로 분야에서 7,400억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된다는 게 미 상무부의 예상이다. 미 업계는 이런 기회를 잡기 위한 최적의 파트너가 핵 산업 주요 당사국인 한국이라고 보고 있다. 그 한국의 발목을 잡는 핵 연료 재처리 문제를 풀어주지 않으면, 경쟁이 치열해진 핵 공급 시장에서 한국이 대미 핵 의존도를 줄인다는 게 미 업계의 우려다.
사실 미국은 기술 사용료와 핵 부품 수출로 한국에서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였다. 발주 단계의 것을 포함한 전체 한국의 원자로 가운데 19기가 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이 해외 원전 수주의 춤을 출수록 미국이 돈을 버는 구조이다. 한국의 수출 품목인 한국 표준형 경수로도 원천기술이 미국 모델에 있고 핵심 부품 기술 역시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안보 논리를 떠나 경제 논리만 보면, 한미원자력협정의 열쇠는 한국에 넘어와 있는 셈이다. 북핵 문제로 치러야 하는 기회비용이 비단 이런 것뿐일까.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