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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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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

입력
2012.06.0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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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니컬러스 에번스 지음ㆍ 김기혁 호정은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500쪽ㆍ2만3000원

호주에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토착민들이 쓰던 언어 중 하나인 카야르딜드 어는 사용자가 이제 열 명도 안 된다. 카야르딜드 어가 소멸 위기에 몰린 것은 1940년대 호주 정부가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원주민 아이들을 기숙학교에 집어 넣으면서부터다. 학교에서 원주민 언어를 말하면 벌을 받았다.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자기네 말을 점점 잊게 됐다.

호주 토착어를 연구해온 언어학자 겸 인류학자 니컬러스 에번스(호주국립대 교수)는 이런 현실을 몹시 안타까워 한다. 지구 주민 60억 가운데 열 명도 안 되는 사람이 쓰는 언어가 없어지는 게 뭐 그리 큰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한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방대한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기록해야 한다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는 사라져가는 언어의 목격자가 세상에 던지는 보고서이자 제안이다. '현장 언어학자'로 유명한 그는 호주와 파푸아뉴기니의 여러 토착 부족을 찾아가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해왔다. 토착어를 쓰는 원주민 노인이 죽어 장례식에 갈 때마다 그는 한 세계가 무너지는 상실감을 느낀다.

책은 언어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언어의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열렬히 설명한다. 영어가 장악한 요즘 같은 세계화 시대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가는 소수 언어들이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서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밝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언어학자와 언어공동체, 대중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저자는 여러 소수 언어의 실제 용례와 그 언어로 전승되는 지식과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이 언어들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문자 기록 없이 구전되는 설화들, 예컨대 뉴기니 고지대 원주민이 쿠와루 어로 읊는 거대한 서사시나 마야의 후예들이 자기네 말로 전승해온 우주론과 철학은 서구의 어떤 고전 걸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유산이지만, 그 이야기들을 실어나르는 언어가 사라지면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낳고 언어와 문화가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빚어내는 풍요로운 결실도 쇠퇴할 수밖에 없다. 언어 연구를 통해 인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한다든지 기록이 없는 까마득한 과거의 역사를 파악하는 일, 아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두 문화의 연결 고리를 찾거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일도 어려워진다.

저자는 "역사상 언어가, 그리고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지식이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10년 안에 전 세계 언어 6000개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제주어도 소멸 위기 언어다. 유네스코는 2010년 제주어를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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