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ㆍ최희봉 옮김ㆍ부키 발행ㆍ311쪽ㆍ1만4800원
흔히 '르포'라고 줄여서 말하는 '르포르타주'를 국어사전에서는 '현지 보고'나 '보고 기사'로 풀이한다. 현장 기사이지만 그냥 어느 날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식의 짧은 보도가 아니다. 현장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그 사건이 담고 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풀어낸다. 발생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베끼고 퍼 나른 토막 기사가 넘쳐나는 세상이어서 더욱 값진 글이다.
사회불평등 문제를 다룬 인상적인 르포를 담은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노동의 배신> 은 미국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가 미국의 저임금 노동을 체험하고 그 실태를 써내려 간 책이다. <대한민국 건강 불평등 보고서> 는 경제 불평등이 의료서비스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한국 시사주간지 기자가 병원 응급실과 호스피스 병동 르포로 재조명했다. 대한민국> 노동의>
미국 월간지 <하퍼스> 에 연재했다가 10년여 전 책으로 묶여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노동의 배신> (2002년에 <빈곤의 경제> 로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가 절판됐다)은 생활 임금 이하의 시급을 받고 도대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체험해 본 것이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 생활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알기 위해서라면 꼭 체험이 필요한 건 아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최저 임금 노동자들의 급료와 집세, 식비, 기타 생활비 등을 계산해보면 되기 때문이다. 빈곤의> 노동의> 하퍼스>
하지만 생물학 박사인 저자는 르포를 시작한 1998년 당시 복지제도의 개혁으로 취업전선에 내몰린 약 400만명의 여성들이 시간당 6, 7달러 정도만 받고 살아가는 비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알고 싶었다. 최종 목적은 물론 그들의 삶이 어떤지를 고발하려는 것이었지만.
저자는 플로리다주 남단 키웨스트에서 식당 웨이트리스, 북동부 메인주에서는 가정방문 청소원, 마지막으로 중서부 미네소타주에서는 대형 슈퍼마켓 월마트의 여성복 매장 직원으로 근무한다. 급료는 팁이 있는 경우 그것까지 보태서 시급 6, 7달러였다. 이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이라고는 싸구려 여인숙이나 트레일러 주택이 고작이다. 방값으로 500, 600달러가 나가버리고 식비, 공공요금, 자동차 기름값이나 다른 생활 잡비로 집세만큼의 돈을 쓰고 나면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는 홀몸으로 건강했고 차까지 있었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철마다 옷 사입는 건 사치로 여기며 땀 흘려 일했는데도 그랬으니 이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가 이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가난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절약법'은커녕 보증금이 없어 비싼 월세를 내며 살거나,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직장을 찾기 위해 견뎌야 할 일주일 정도의 급료가 아쉬워 지금 일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가난해서 추가로 드는 비용만 수두룩한' 생활이었다.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빼고 거의 대부분 일만 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임금 인상을 원하지 않은 경영자들이 만든 '포로수용소' 같은 일터에서 가난을 범죄처럼 보는 사회 분위기에 짓눌려, 저항하기보다 '굽실거리는'데 더 익숙했다.
저자는 빈곤이라는 것은 그냥 조금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마치면 현기증이 나고, 차가 집을 대신하기도 하고,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일을 나가야 하는, 삶 자체의 위기 상황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고 일한 덕분에 편하게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지난해 출간 10년을 기념해 낸 개정판에서 미국의 상황은 더 나빠졌으며 해결책은 임금 인상과 의료ㆍ복지 혜택, 공공사업 확충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건강 불평등 보고서> 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는지 살피기 위해 저자는 한 달 간 무료 호스피스 병동(성가복지병원)에서 간병 자원봉사를 했고, 외상환자들이 실려오는 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과 환자 가족을 취재했다. 말기암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가난한 환자들의 지금 형편과 살아온 삶을 간결해서 여운이 남는 문장으로 차분히 복원한다. 그리고 계층별 암사망 통계 자료를 적절히 인용해 '암도 가난을 차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대한민국>
찢기고 터지고 깨지는 외상이 블루 칼라에게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중졸 이하 학력의 아버지를 둔 집 아이의 사망위험 수준이 대졸 이상 집안보다 2배를 넘는다면? 대물림 되는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삶과 죽음 그 자체를 아이들은 물려 받는다.
이미 수도 없이 언론을 통해 지적돼왔듯 이들을 살릴 국내의 응급 처치 실태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적절한 진료와 수술을 받았더라면 살 수 있을 사람이 한 해 1만 명 정도 응급실에서 숨을 거둔다는 추산은 충격적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하기 때문에 더 쉽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불평등의 조건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통계 자료를 인용한 이 르포는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소득 불평등이 줄어야 하는데도 한국 사회는 '모든 계층이 골고루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이 죽는 길로 굳이 함께 걸어가고 있다'고 꼬집는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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