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건 타도" 혁명의 깃발 올린 지 100년… 中서 '봉건'은 사라졌는가
창장(長江) 하류의 고도 난징(南京). 폭 1㎞를 넘나들 정도로 몸집을 불린 창장을 내려다보는 쯔진(紫金)산 자락은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가 또 다른 강을 형성하고 있었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자락의 회색 계단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이들이 힘겹게 올라가는 언덕 위에 신중국의 선구자 쑨원(孫文)이 묻힌 중산릉(中山陵)이 있다.
1866년 광둥(廣東)성에서 태어나 1925년 베이징(北京)에서 생을 마친 쑨원은 자신이 영면할 장소로 난징을 택했다. 그는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그 해 2월 12일에는 청(淸)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가 퇴위를 선언했다. 1911년 10월 우창(武昌)에서 깃발을 올린 신해혁명과 쑨원의 임시 대총통 취임으로 진시황(秦始皇) 이래 2,100여년을 이어온 중국의 황제 체제가 막을 내렸다.
신중국의 첫 지도자 쑨원은 중국 마지막 능의 주인공이 됐다. 쑨원이 사망하자 국민당은 3년에 걸쳐 묘지 조성에 나섰다. 하늘에서 보면 종 모양을 한 중산릉은 길이가 남북 700m에 달한다. 높이 70m의 언덕을 따라 당시 중국 인구 3억9,200만명을 뜻하는 392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중산릉의 위용은 옆에 있는 명(明)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효릉(明孝陵)의 웅장함을 능가한다.
한 문화를 이루는 풍습 중 가장 늦게 변하는 것이 장사(葬事)와 관련한 풍습이라는 인류학자들의 지적처럼 쑨원은 공화국으로 가는 첫 문을 열었지만 중국인들은 그의 묘를 황제의 그것처럼 만들었다. 중산릉의 능문에 적힌 '모두를 위한 천하(天下爲公)'라는 뜻의 쑨원 친필 글씨는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런 모순적 풍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간쑤(甘肅)성에서 온 관광객 루(陸ㆍ61)씨는 "그 때는 다 무덤을 만들던 때였기 때문에 쑨원의 무덤을 웅장하게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중산릉에서 볼 수 있는 미완의 풍경은 쑨원의 삶과도 포개진다. 쑨원이 광둥 등에서 주도한 10여차례의 봉기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가 신해혁명을 촉발시킨 우창봉기 소식을 접한 것도 기금 모금을 위해 여행 중이던 미국에서였다. 그는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자리를 취임한 지 두 달도 안 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꿈꾼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의 건설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가 숨진 뒤 중국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실패한 혁명가' 쑨원은 그가 즐겨 사용한 박애라는 표현이 자신에게 되돌려진 듯 너른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대만과 중국에서 함께 존경받는 현대 중국의 드문 지도자다. 그가 사후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사상과 행보의 모호함 때문인지 모른다. 조너선 스펜스는 <현대 중국을 찾아서> 에서 신해혁명기 쑨원의 사상에 대해 "친공화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대체로 사회주의적 색채를 띠었으며 중국을 강력한 근대국가로 만들 제도의 개발에 대해 보편적 희망을 얘기했다"고 평했다. 국민당을 창당한 쑨원은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이끌었고, 레닌이 사망했을 때 그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공개적으로 찬양했다. 현대>
이에 대해 난징대에서 만난 장셴원(張憲文) 교수는 "쑨원이나 국민당, 공산당 모두 인민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이상을 추구한 것은 같았다"며 "쑨원의 가장 큰 공은 황제로 상징되는 중국의 봉건체제를 끝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쑨원이 실패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그는 "혁명의 출발점을 만든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평했다.
중산릉에 오르면 쑨원 이후 지도자들의 마지막 모습도 돌아보게 된다. 1976년 사망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시신이 방부 처리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 기념관에 안치돼 있다. 1997년 숨진 덩샤오핑(鄧小平)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됐고 유골은 홍콩 인근 바다 등에 뿌려졌다.
쑨원이 세상을 뜬 지 87년이 지난 지금 중국이 전근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중국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태자당(太子黨ㆍ공산당 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정치 파벌)이란 단어에선 전근대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차기 지도자 시진핑(習近平)도, 세계의 이목을 끌며 낙마한 보시라이(薄熙來)도 태자당이다. 후진타오(胡錦濤)와 원자바오(溫家寶)의 자식도 재계의 요직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며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상하이 푸단(複旦)대에서 만난 판종치(潘忠岐) 교수는 "권력과 부를 대물림 하는 것은 현대 중국의 가장 나쁜 현상 중 하나"라며 "하지만 자식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사상을 가진 한국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했다.
난징=류호성기자 rhs@hk.co.kr
■ 중산릉 입구서 기념품 팔아 BMW 모는 황샤오홍
중산릉 입구의 가게 중 사람의 발길이 자주 머무는 곳은 지도자 기념품점이다. 쑨원과 마오쩌둥의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는 가게에 들어서면 중국 현대 지도자들을 거의 모두 만날 수 있다. 쑨원과 26세 연하의 아내 쑹칭링(宋慶齡)이 함께 찍은 사진이 뚜껑으로 쓰인 손거울은 15위안, 마오쩌둥의 얼굴을 새긴 라이터는 38위안, 덩샤오핑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 등 각 세대 지도자의 사진이 함께 들어 있는 기념품은 35위안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초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카운터에는 가게 주인 황샤오홍(黃韶紅ㆍ45)씨가 앉아 있다. 그는 "가장 많이 팔리는 건 마오쩌둥 기념품이고 쑨원 것도 잘 나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BMW 승용차를 갖고 있다는 황씨는 수완이 뛰어나다. 그가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2월. 중산릉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2010년 11월 입장료를 없앴다. 80위안이던 입장료가 사라지자 관람객이 하루 1만명에서 4만명으로 늘었다.
황씨의 고향은 후난(湖南)성 샤오산(韶山), 바로 마오쩌둥이 태어난 곳이다. 평범한 농가에서 자란 황씨는 고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여덟살에 마오쩌둥 생가 기념관에 취직했다. 보안요원으로 일하던 그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1993년 마오쩌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 앞에 상가가 조성되면서다. 당시 빚을 내 가게를 얻었다는 그는 "기념관 직원이었기 때문에 상가를 받기 쉬웠다"고 말했다. 이때 그가 선택한 상품이 지도자 기념품이다.
황씨는 샤오산과 중산릉 외에 세 군데에 가게를 갖고 있다. "시장 조사를 위해 어지간한 지역은 다 가봤다"는 그는 철저한 시장 조사와 적재적소에 가게를 여는 수완 덕에 많은 돈을 번다. 한해 수입이 50만위안(약 9,200만원) 정도로 지난해 중국의 1인당 평균 국내총생산(GDP) 3만4,700위안의 10배가 넘는다.
그는 샤오산기념관 직장 동료와 결혼해 2남1녀를 두었는데 막내를 낳았을 때는 벌금으로 2만위안을 냈다. '한 자녀 정책'을 시행하는 중국에서 다자녀는 부의 상징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는 아침으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점심도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때운다. 아직 갈 길이 바빠 보이는 그의 목표는 자녀들에게 닿아 있었다. 그는 "아이들 결혼시킬 때 집과 자동차를 마련해주고 싶다"며 "그 다음엔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난징=류호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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