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뒤 많은 반나치주의자와 유대인이 억압과 위협을 피해 독일을 떠났다. 스위스 등 주변국이 임시 피난처였으나 상당수가 미국으로 갔다. 천재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작가 토마스 만, 극작가 베를토트 브레히트, 여배우 마를렌느 디트리히,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가 대표적이다. 특히 1920년대 무성영화 전성기를 이끈 영화인 2,000여명이 헐리우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한 노벨상 작가 토마스 만은 작가에게 소중한 조국을 등진 상실감을 묻자 “내가 있는 곳이 독일”이라고 답했다. 그는 2차 대전 중 대독 선전방송에 참여,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독일 역사와 대중에도 책임이 있는 집단 범죄라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그를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 변절자로 배척한 독일인들의 집단적 적대감은 패전 뒤에도 남았다. 20세기 최고의 독일 작가는 결국 1952년 스위스에 정착해 생을 마쳤다.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세상을 유혹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마를렌느 디트리히도 배신자, 변절자 낙인이 찍혔다. 나치의 선전수단 노릇을 거부하고 망명, 유럽 전선의 미군 위문 활동에 앞장 선 탓이 컸다. 가수 출신인 그는 1960년 유럽 투어 때 조국 독일을 찾았다가 달걀 세례를 받았다.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노년을 파리에서 은둔하며 살다가 죽어서야 고향 베를린에 돌아갔다.
▦이와 달리, 뒷날 동독을 등진 반체제 인사 등에 대한 동독 주민의 적대감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동독이 체제 안정을 해치는 지식인과 노령자 300만 명의 서독 이주를 공식 허가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제와 조국을 동일시하지 않은 인식이 바탕이다. 분단을 과도적 상황으로 여긴 것이다. 이에 비춰보면,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비난한 자들은 북한 체제의 집단 심리에 동화(同化)한 모습이다. 특히 통일을 되뇌지만 분단을 영구불변으로 여기는 모순된 심리가 엿보인다. 이래저래 도착(倒錯)적이다.
강병태 논설고문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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