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글로벌 경제위기가 장기화 국면으로 이어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업종을 불문하고 근본적인 위기 극복 전략을 고민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은 기업들이 이 위기 극복을 중장기적 미래 전략과 연계해 추진한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의 전략도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위기가 닥치면 마른 수건을 짜는 심정으로 원가를 절감해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허리띠를 조이는 것만으로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 만큼 기업들은 중장기적인 미래 전략을 새로 마련하고 있다.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 기술과 서비스 개발에 치중하며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하는 등 기업과 업종에 따라 차별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재계 관계자는 "어떤 전략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며 "특히 시장 경쟁력을 갖춘 시장 선도기업들의 위기 전략이 곧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늠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반도체·LCD
최근 1~2년 사이에 세계 반도체ㆍ액정화면(LCD) 업계는 상대가 망할 때까지 밀어붙이는'치킨게임'을 치열하게 펼쳤다. 생존이 걸린 싸움은 출혈 경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공급 과잉이 지속되면서 시황은 악화됐다. 이처럼 사활을 걸고 진행됐던 전세계 반도체ㆍLCD 업계의 치킨게임이 올 들어 한국 기업의 승리로 사실상 막을 내리는 분위기이다. 치킨게임에서 이기려면 원가절감이 필수인데,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력에서 앞선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에서 뒤처진 해외 업체들은 추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업계 세계 3위인 일본 엘피다는 파산보호신청과 함께 경쟁에서 밀려났고, 세계 5위인 대만 업체 난야도 감산에 들어가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LCD 업계도 마찬가지다. 세계 3위인 대만 AU옵트로닉스(AUO)와 세계 4위인 치메이이노룩스(CMI) 등이 적자가 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국내 업체들은 또 다시 닥쳐올 지 모를 미래의 위기에 대비해 여전히 기술리더십 유지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특히 세계 1위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는 끊임없는 기술개발을 강조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9월 경기 화성 나노시티캠퍼스에서 열린 세계 최초로 20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m) D램 및 낸드플래시 반도체 양산 축하 행사에서 "많은 직원들의 노력으로 기술리더십을 지킬 수 있었지만 앞으로 반도체 업계에 더 거센 파도가 몰아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20나노급 제품을 양산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강조했다. 빠르게 변해가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기술리더십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면 금새 추월당한다는 경고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방침을 반영해 삼성전자는 지난 달 말 세계 최초로 20나노 미세공정을 적용한 모바일 D램까지 양산에 성공했다. 모바일D램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 휴대기기의 주기억장치로 널리 쓰이는 인기 제품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존 제품보다 20나노급 모바일 D램은 두께가 약 20% 얇아 점점 얇아지는 스마트폰 등 휴대기기용으로 적합하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분야의 또다른 축인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분야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신성장 동력으로 꼽고 있는 시스템반도체는 소프트웨어가 내장돼 있어 특수하게 주어진 일을 처리한다. 그만큼 스마트폰과 태블릿PC는 물론이고 TV 냉장고 자동차 등 점점 지능화하는 각종 기기에 장착할 수 있어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다.
올 하반기 삼성전자와 같은 20나노급 모바일 D램을 양산 예정인 SK하이닉스도 미래 기술력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핵심사업인 메모리반도체 분야를 강화하고 시스템반도체 부문으로 영역을 확대해 세계적 종합반도체 기업으로 재도약하겠다"고 회사의 중장기 미래 전략을 소개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늘어나는 모바일 기기를 본격 성장의 지렛대로 삼기 위해 지난해 40% 수준에 머물렀던 모바일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모바일 제품군 비중을 2016년까지 70%대로 늘려나갈 방침이다. 또 일본 도시바 및 미국 휴렛팩커드(HP)와 손잡고 2010년부터 다양한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LCD 업계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대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상용화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LCD사업부와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 S-LCD 등을 합쳐 7월에 공식 출범을 앞둔 삼성디스플레이는 OLED 시장에서 선두를 유지할 방침이다.
2007년 세계 최초로 OLED 양산에 성공한 삼성전자는 줄곧 90% 이상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지켜내고 있다. 지난해 5월말 업계 최초로 5.5세대 OLED 생산시설을 가동하며 이 부분 선두업체의 위상을 한층 더 강화했다.
재팬디스플레이나 대만 AUO 등 뒤늦게 뛰어든 해외 후발 주자들은 이제 막 견본 수준의 시제품을 내놓았다. 반면 삼성디스플레이는 이미 차세대 디스플레이 상용화에 착수해 이들보다 한 발 앞서가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 관계자는 "휘어지는 플렉서블 OLED 패널이 이르면 내년 초에 상용화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도 세계 LCD 시장의 불황을 뚫을 전략 무기로 OLED를 꼽고 있다. 2008년 초 LG전자의 OLED 사업을 넘겨 받은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12월 55인치 TV용 OLED 패널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LG디스플레이는 올 하반기부터 경기 파주의 8세대 LCD 생산시설에서 55인치 TV용 OLED 패널을 본격 생산할 예정이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올해 3분기에 대규모 생산 능력을 갖춘 OLED 투자 계획도 밝힐 것"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OLED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 휴대폰 '감성 코드로 스마트폰 석권'
세계적 기업인 노키아와 모토로라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한 때 세계 휴대폰 업계를 주름 잡았던 전통의 강호였다는 점이다. 노키아의 아성은 10년 이상 지속됐고 휴대폰 원조였던 모토로라 역시 '레이저'를 앞세워 한 시대를 풍미했다.
더불어 애플의 스마트폰 '아이폰' 때문에 몰락했다는 점도 닮았다. 아이폰에 직격탄을 맞은 노키아는 세계 1위 자리를 삼성전자에 내줬고 모토로라는 구글에 넘어갔다. 스마트폰 적기 대응에 실패한 후유증은 예상보다 혹독했다. 국내 휴대폰 업체들이 스마트폰 주도권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겪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다.
휴대폰 세계 1위에 오른 삼성전자의 주된 전략도 철저히 소비자 눈높이에 맞춘 편의성 강화에 있다. 스마트폰의 이용자 경험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복안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향후 스마트폰의 경쟁력은 눈에 보이는 기능보다 이용자 관점에서 얼마나 더 많은 감성적 경험을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올해 내놓은 야심작 '갤럭시S3'도 이 같은 전략에서 탄생했다. 스마트폰이얼굴과 음성, 눈, 동작 등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인식해 작동한다. 음성으로 통화와 알람, 사진 촬영 등 다양한 기능을 편리하게 동작시킬 수 있고 음악 감상 중 이전 곡과 다음 곡 재생 및 음량 조절까지 할 수 있다. 또 이용자가 화면을 보고 있으면 눈 깜빡거림을 인식해 화면이 저절로 꺼지는 것을 방지한다.
삼성전자는 기기 뿐 아니라 내용을 차별화 할 수 있는 콘텐츠 강화도 적극적이다. 이를 위해 공격적인 기업 인수ㆍ합병(M&A)에 나섰다. 삼성전자가 지난 달 미국 캘리포니아의 클라우드 콘텐츠업체인 엠스팟을 전격 인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엠스팟은 미국 통신업체에 휴대기기를 위한 음악과 동영상 전송 서비스를 제공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엠스팟 인수를 계기로 차별화 된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공을 할 수 있게 됐다"며 "휴대 기기용 오락 서비스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LG전자가 차별화된 승부수를 꺼낸 카드도 이용자 경험(UX)이다. 보다 안정적이고 쾌적한 UX에서 미래의 스마트폰 시장 경쟁력이 결정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LG전자가 올해 전략폰으로 지난달 17일 공개한 '옵티머스 LTE 2'에 세계 최초의 2기가바이트(GB) 램(RAMㆍ주기억장치)을 채용한 것도 단순한 기술 과시용이나 사양을 높이기 위한 게 아닌 UX 때문이었다. 램의 용량이 커야 이용자들이 여러 개의 응용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 속도가 떨어져 불편하게 만들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서 바로 자신의 생각을 손 글씨로 적어 문자 전송이 가능한 '퀵 메모' 기능도 이용자감성을 높이기 위해 내장됐다. 휴대폰 사업을 전담하는 LG전자 MC사업본부는 이 같은 이용자 중심의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도 진행 중이다. 박종석 LG전자 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MC) 사업본부장은 "휴대폰 시장은 하드웨어 경쟁에서 이용자 경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옵티머스 LTE 2의 고사양도 단순한 성능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용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편의성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허재경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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