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성장'을 화두로 교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교사들이 생각하는 학생들의 성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성장을 위해서 교사들은 또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토론하고 있다. 어떤 교사들은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하고 싶은 것을 줏대 있게 하게 되는 것이 성장이라고 말한다. 부모이건 사회건 남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목수면 어떻고, 가수면 어떻고 또 식당주인이면 어떤가? 이렇게 말하는 교사들의 눈에는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늘 교실에 엎어져 있는 학생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가득하다. 꿈이 뭐냐고 물으면 '왜 그런걸 묻냐?'고 고개를 파묻어버리는 학생들 말이다.
얼마 전 방문했던 학교에서도 그랬다. 수업종이 울리기 5분전에 복도에서 들여다본 교실은 절반이 '전멸'이었다. 맨 앞의 한두 줄 정도나 깨어서 수업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교사들은 무력감을 호소한다. 저 학생들이 왜 저런지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지 않고, 자신들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수업을 재밌게 하기 위해 게임이나 활동적인 교과과정을 도입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반짝 학생들의 주의를 끌어올 뿐 교과서로 옮겨가는 순간 학생들은 다시 엎드려버린다고 한다.
사실 학교현장에 있는 많은 교사들이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이 교실에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다수의 교사들이 모범생 출신들이거나 학교에서 불편했던 경험이 없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수업을 땡땡이 쳐본 적이 별로 없으니 시험이 끝나고는 '방과 후 학습'이나 자율학습에서 '도망'을 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교사와 학부모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말이 "그냥요"다. 왜 땡땡이를 쳤냐는 말에 "그냥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도망가는데 그냥이 어디 있냐고 '이유'를 말하라고 다그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그냥요"다. 공부하기가 싫어서 도망간 것인지, 게임이 그렇게 재밌어서 도망간 것인지를 물어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냥요"라고만 대답한다. 이 대목에서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학생들의 이 '그냥요'를 이해한다는 교사를 이번에 인터뷰를 하면서 만났다. 나 또한 이 '그냥요'에 미치기 일보직전인 사람이었던 지라 그 교사에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물어봤다. 그 교사는 나를 대단히 측은하다는 것이 쳐다보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선생님은 그냥 살아보신 적이 없습니까?" 순간 벼락 맞는 느낌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분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 아니 나아가 인간의 '삶'이 보였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실 그냥 살잖아요. 무의미를 견디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는 유독 학생들에게는 의미를 강요할까요?" 그 이후로 교사는 학생이 "그냥요"라고 하면 "그래 살아보면 그냥 그럴 때도 있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곤 한단다.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학생들이 곧 이 교사에게 깊은 신뢰를 갖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를 아는 것을 통해 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든 것이 인간과 삶 자체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교육은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가르치고 생각했다. 삶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죽음을 통할 때만 삶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삶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무의미를 공유하며 우리 인간 삶에 공통된 운명에 대해 서로 자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한 배움이 어디 있겠는가.
엄기호 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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