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SBS 드라마 '패션왕'의 주인공 정재혁은 좋아하는 여자의 사랑 말고는 결핍이 없는 패션재벌로 이기적이고 뒤틀린 사랑을 하는 남자의 찌질함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영화 '건축학 개론'의 대학 신입생 승민 역시 어설프고 소심한 '찌질이'다. 그런데 이제훈(28)의 몸을 빌려 나타난 그들, 한심하기보단 측은한 것이 어딘지 챙겨주고 싶어진다. 풋풋한 미소로 찌질함마저 감싸고 싶게 만드는 배우 이제훈을 5일 만났다.
이제훈은 "요즘 초등학생부터 할머니들까지 알아봐 놀랍다.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피부로 와 닿는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지난해 영화 '파수꾼'과 '고지전'을 통해 주목을 받았으나, 4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건축학 개론'과 드라마 '패션왕'이 동시에 인기를 얻으며 최근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그는 '패션왕'에서 그간 해본 것 중 가장 부유한 역할을 맡아 줄줄이 대기한 럭셔리 브랜드 옷을 입는 호사를 누렸다. "'건축학 개론'에선 촌스러운 패션에 철자 틀린 짝퉁 티셔츠까지 입어 망신 당했는데, 이번엔 원 없이 옷을 고를 수 있었어요."
재벌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다는 그는 "드라마 속 전형적인 재벌 후계자 말고 좀 더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정재혁은 뭐하나 부럽지 않은 위치지만 사랑에서는 결핍을 가진 인물이잖아요.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성공에 집착하고 사랑도 쟁취하고 싶은데 잘 안돼서 괴로워하는 거죠." 여리고 상처 잘 받는 정재혁은 동대문 시장 출신으로 어렵게 패션계에 진출한 라이벌 영걸(유아인)에게 야비한 짓을 할 때조차도 그리 비열해 보이지 않았다. 나쁜 남자를 하기에는 너무 착해 보이는 이제훈의 외모가 한몫 했다. "처음에는 시청자들에게 호감으로 다가가진 않겠구나 했는데, 아버지에게도 가영(신세경)에게도 자꾸 내쳐져서 그런지 불쌍하게 봐주시더라고요."
첫사랑 얘기를 묻자 이제훈은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고2때 사귀었던 친구인지 대학가서 만난 친구인지…"하며 망설이더니 "가슴 절절히 아팠던 경험이라면 대학 때였던 것 같다"고 했다. 혹시 영화 속 수지가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왔을 때 "꺼져줄래"라는 말을 내뱉는 싸늘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저라면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요"라면서도 단호한 모습이다. "표현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라… 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렇게? 아무튼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희망고문은 좋은 선택이 아니잖아요." 실제 이제훈은 승민처럼 찌질할 정도로 답답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승민보다는 어설픈 연애코치 납뜩이(조정석)가 공감이 됐다고. "실제로 친구들 연애고민 상담해 준 적이 많았어요. 납뜩이를 내가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봤죠."
이제훈은 고려대 공대 2학년 때 연기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자퇴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했다. "신뢰가 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꿈. "이제 배우 이제훈이 이렇게 연기하고 이런 작품에 나왔습니다, 하는 정도니까 앞으로는 기대에 부응해야죠."
2007년 데뷔 이후 작은 역할부터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아오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오른 그는 코믹 공포물 '점쟁이들'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세 작품을 연달아 찍느라 살면서 가장 마른 체형이 되어버렸다면서 "운동도 다시 시작해서 '고지전' 때처럼 다부진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끝난 지 얼마 안돼 쉬고 싶기도 하지만 빨리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되도록 빨리 카메라 앞으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이수연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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