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어. 추운 겨울날 일본 경찰들에게 맨발로 끌려가서 아버지 있는 곳을 대라며 매질 당한 것만 수 차례였지. 아버지 돌아가신 후 홀로 3형제를 키웠는데 둘째 형님까지 전쟁에서 총을 맞고 돌아오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
현충일을 이틀 앞둔 4일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자 5ㆍ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아버지인 황길현(81)씨는 국가유공자 3대의 험난한 가족사를 꺼내다 말고 어머니 생각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황씨는 며칠 전 국가보훈처 광주지방보훈청으로부터 의병장이었던 아버지와 6ㆍ25전쟁 참전 상이군인이었던 형, 5ㆍ18민주유공자인 아들까지 더해 일가가 '3대 보훈 명문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씨는 "'3대 보훈 명문가'라 하니까 듣기는 좋겠지만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며 입을 뗐다.
부친 황병학(1876~1931) 선생은 을사늑약 직후 포수 100여 명을 모집해 전남 광양시 백운산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했고 이후 만주지역과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어린 시절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기억밖에 없어. 아버지가 넉넉했던 집안 살림을 죄다 의병과 독립운동 자금으로 쓴 거지. 어머니도 형들도 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밤낮으로 일본 순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괴롭히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고 해."
황씨의 둘째 형 봉현(98년 작고)씨는 광양진상농고 3학년 때 6ㆍ25전쟁이 터지자 친구 6명을 설득해 자원 입대 했지만 그 해 12월 양구지구 전투에서 허리 관통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63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됐지만 그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형은 학교에서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말을 한다는 이유로 해직 됐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들 얘기를 묻자 덤덤하게 가족사를 풀던 황씨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80년 당시 광주일고 3학년인 황씨의 둘째 아들 호걸씨는 5ㆍ18민주화운동에 참가했다 23일 밤 차를 타고 전남 화순으로 이동하던 중 공수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전날 집에 총을 갖고 왔길래 다시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어.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였는데. 그날 그렇게 나가더니 다음날 '시체 찾아가라'고 전화가 온 거야." 황씨는 "그날 더 말렸어야 했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목공소 일이나 배우고 서커스 극단이나 따라 다니던 삶이야. 아버지나 형님처럼 국가를 위해 한 일이 없지. 다만 그런 분들을 기억하고 또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이지." 황씨는 정작 자신의 굴곡진 삶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만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아버지와 광주 망월동 국립 5ㆍ18민주묘지에 안치된 형과 아들을 수시로 찾아 넋두리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황씨는 "형님을 머지않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모실 계획"이라며 "이제 서울, 대전, 광주를 부지런히 오가는 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방보훈청을 중심으로 3대에 걸친 보훈명문가를 찾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집안은 황길현씨 일가뿐"이라고 말했다.
광주=글·사진 박철현기자 kar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