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냉전체제 붕괴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전략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미국을 위협하던 소련이 해체되면서 잠재적 위협국가로 등장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미 국방전략을 담은 '2001년 4개년 국방정책 검토보고서'는 전략의 중심을 대서양에서 아태지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9ㆍ11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하면서 이 같은 전략의 실행은 10년 이상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2일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의 발언은 미국이 이전 전략으로 복귀했음을 공식 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1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패네타 장관은 이날 "미 해군력의 아태지역 비중을 60%로 증강하겠다"며 신국방전략의 구체적 내용을 처음 공개했다. 해군 전력의 핵심인 항공모함은 현재 11척 가운데 내년 퇴역 예정인 엔터프라이즈호를 비롯, 6척이 아태 지역에 배치돼 있다. 패네타 장관은 2015년 새로 취역할 제럴드 R 포드호를 투입시켜 아태지역에 6척의 항모를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282척인 군함이 300척으로 늘어나면 아태지역에서는 지금보다 30척 가량이 늘어난 180척이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미국이 아태 중시 전략의 핵심으로 해군력을 증강키로 한 것은 해양 헤게모니가 미 군사전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군력은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지상군이나 공군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비용으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냉전 해체 이후인 1990년대부터 군비를 감축해온 미국이 해군력만큼은 감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가 군함 추가 건조를 비롯, 해군력 강화를 공약으로 내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군 군함의 증파를 앞두고 미국은 아태지역 특히 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과 해군기지 확보를 위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호주에 해병대 2,500명을 파견하고 해군 군함이 기항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한 상태다. 해양 수송로의 요충지인 말래카 해협에 위치한 싱가포르에는 내년 상반기부터 연안 전투함 4척을 배치키로 했다. 베트남과 필리핀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이 격화하자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3일 베트남을 방문한 패네타 장관은 1975년 월남전 종전 이후 미국 장관급 인사로는 처음 미 해군기지가 있던 캄란만을 방문했다. 1991년 미군이 철수한 필리핀에서도 미군의 재배치가 논의되고 있다.
미국은 동북아에서는 한국과 일본, 남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호주라는 2개축의 3각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최근 미얀마와 관계를 강화하는 측면에는 미얀마가 중국의 인도양 진출을 위한 교두보란 전략적 가치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군은 지난해 172차례에 걸쳐 아태지역에서 양자, 다자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처럼 미국이 아태지역 국가들과 군사적 관계를 강화하면서 해군력의 60%가 배치될 경우 인도양에서 말래카해협, 남중국해 그리고 동해에 이르는 중국의 해양 수송로가 미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중국은 일단 패네타 장관 발언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며 미국과의 정면 충돌은 피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아시아안보회의에 4차례 참가한 바 있는 중국 학자 이날 옌쉐퉁(閻學通)은관영 매체 환추왕(環球網)과의 인터뷰에서 "거의 매년 샹그릴라대화의 주제가 바로 중국위협론이었다"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올해 패네타 장관의 논조는 오히려 온화하고 균형 잡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런하이첸(任海泉) 인민해방군군사과학원 부원장(중장)은 "현재 중국은 매우 복잡하고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앞으로 더욱 위험한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면서 "위기 의식을 강화,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중국은 특히 남중국해 이해 당사국들이 패네타 장관의 발언에 힘입어 영유권 확보 시도를 강화하려는 데에 대해선 못을 박았다. 푸잉(傅瑩)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이날 싱가포르 연합조보에 낸 기고문을 통해 "황옌다오는 중국의 고유 영토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소국이 마음대로 대국을 침범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남중국해의 황옌다오(스카보러섬)를 놓고 필리핀과 벌써 2개월째 맞서고 있다는 점에서 소국은 필리핀은 가리킨다. 중국은 또 남중국해 문제는 당사국끼리 해결해야 한다며 미국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해왔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박일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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