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금융지주에 외환은행을 팔고 4조6,000억원의 실익을 챙겨나간 론스타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제소(ISD)를 하겠다는 의사를 최근 밝히면서 송기호 변호사(49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대표)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FTA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ISD의 위험성을 경고해온 그의 통찰력이 옳았다는 게 밝혀진 셈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이 국가정책의 문제까지 트집을 삼을 때 무기가 되어주는 ISD제도의 폐해를 그는 꾸준히 지적해왔고 FTA를 체결하더라도 ISD는 도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왔다.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발기인이자 전남지역 정책실장까지 지낸 농업전문가인 그는 영어실력도 탁월해서 미국과의 쇠고기협상에서 정부가 결정적인 영어 규정을 틀리게 해석한 것을 짚어냈는가 하면 한미FTA의 번역오류까지 다 지적한 통상분야의 전방위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를 만났다.
_ISD, 정확히 뭔가요? 투자자-국가소송제라고들 번역하는데 소송은 아니고요.
"소송은 각 나라의 사법부가 하니까 사회적 공평이나 정의를 추구하려는 합의가 있는 거지요.반면 이 제도는 국제거래에서 신속하게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의 이익을 조정해주는 국제중재절차입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중재라고 하면 중간에서 화해를 시켜주는 느낌이 강해서 저는 ISD를 '투자자국가제소권'이라고 부릅니다. 소송은 재심도 할 수 있는데 중재는 한번 결정하면 끝이거든요."
_론스타가 걸고 있는 한_벨기에 투자협정보다 한미FTA는 더 위험합니까?
"그렇지요. 한_벨기에는 말그대로 투자보호협정이잖아요.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국가간의 조약을 강제할 현실적인 방법은 사실상 없어요.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여러 공공정책을 폈는데 이 투자자국가제소에 걸려서 많이 패소했어요.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이 결정을 집행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미국은 FTA에 ISD를 포함시켜서 투자협정과 무역을 연계시켰어요. 투자협정을 안 지키면 무역보복을 할 수 있으니까요."
_다른 나라들은 FTA를 체결하면서도 ISD 조항을 안 넣는다고요.
"국제투자법 영역에서는 흐름의 변화가 있어요. 국가가 국민정책을 위해서 필요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견해와 투자가 기본적으로 장기적인 위험을 내포하는 거니까 국가가 배려해줘야 한다는 의견. 금융자본주의가 굉장히 강화될 때는 ISD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우세했어요. 이게 있어야 투자가 들어온다. 그러나 문제점이 밝혀진 다음에는 ISD 제도하고 투자증가는 아무 관계가 없다가 됐어요. 중국과 브라질을 보면 FTA에 ISD를 넣지 않아도 여러 나라가 투자를 많이 하거든요. 호주는 자국의 천연자원이나 에너지 광물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과 FTA를 하면서 ISD를 넣지 않았지요."
_우리나라는 무역에 의존하니까 ISD가 필요한 나라 아닐까요?
"외국에 투자하고 돈을 버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국내 공공정책이 흔들리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요. 우리는 사회구성원의 기본적인 삶과 직결되는 공공서비스는 상식적으로 당연히 다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전기나 수도. 그런데 한미FTA에서 투자자 보호협정을 보면 이곳이 민영화가 되면 서울시와 9호선 사례에서 보듯이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ISD를 제기할 수도 있어요. 더구나 한미FTA나 유럽FTA가 체결됐지만 수출은 오히려 5월 통계에서 줄었거든요. 지금 외국에서 민영화에 투자한 기업들이 주로 들고나오는 것이 '공정 공평한 대우조항(Fair and apitable treatment FAT)'이에요. 여기 보면 투자자를 오래 불안하게 두는 것도 공정 공평하지 않는 대우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론스타가 2003년에 들어왔고 2012년에야 팔았는데 그 사이에 한국정부가 론스타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 지금은 정치상황이 너무 안좋다, 그랬는데 막상 가니까 또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 이런 일련의 조치들이 적법한 것인지를 따질 수도 있어요. 문제는 론스타가 제소의향서를 보냈는데 정부가 그걸 공개하지 않고 있어요. 민변은 론스타가 보낸 제소의향서 원문을 공개하라고 1일 정부에 정보공개청구를 했어요. 캐나다나 미국이나 ISD를 운영하는 나라는 다 공개構?있어요. 한국정부에서 밀실에서 서로 들어주면서 끝내면 시민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끝나거든요."
_그럼 ISD는 넣지 말아야 합니까.
"ISD가 있어서 투자가 늘어난다는 것이 입증된 바가 없고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 없어요. 미국이 ISD를 넣은 것이 금융자본을 보호하기 위해서에요. 론스타나 서울지하철 9호선을 놓고 보면 국내에 들어와서 직접 투자하는 게 아니라 펀드들이잖아요. 과연 그런 돈이 들어오는 게 우리 경제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TPP(trans pacific partnership)라고 환태평양FTA에 미국이 우리나라더러 들어오라고 하고 있어요. 베트남 부르나이 등 4개국이 하던 걸 미국이 일본 호주 뉴질랜드 칠레 해서 9개 나라가 하자는 거지요. 이 9개 나라의 법률가들도 지지난주에 여기에 ISD를 넣으면 안된다는 연대성명을 발표했어요."
_송변호사가 오히려 정부보다 더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것 같네요.
"법원의 판결문을 읽어보면 다수의견, 소수의견, 별개의견까지 있어요. 법적인 쟁점에 대해서도 이렇게 대법관끼리도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FTA 문제에서 정부하고 생각이 다르면 괴담이라고 하니까 힘들어요. 지난 달 민변 총회 때 외교통상위원회를 만들었어요. 20, 30대 변호사가 스무명이 있어요. 민변의 2세대 변호사는 저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눈으로 WTO나 FTA를 보고 정부에 들어가 경험도 쌓길 바라요. 정부랑 싸움만 해서는 성장이 안되잖아요."
_실제 변호사로서 업무는 주로 어떤 일을 하세요?
" WTO나 FTA에 대한 연구, 서울한살림 감사처럼 식품 소비자 관련 일이나 협동조합 관련 자문을 하지만 둘다 돈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변호사 사무실을 움직이는 것은 국제거래나 분쟁에서 기업의 업무를 대신하는 일을 해요.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일본에서 국제거래 분쟁이 생기면 도와주고 지역연구 리포트도 하고."
_원래는 농사를 지으셨다고요.
"기자가 되고 싶어서 사회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그때(81학번)는 학생운동을 하면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서 죽기도 하던 시절이니까 아버지가 극렬 말리셨지요. 아버지 말대로 졸업은 해드릴 테니 그 다음 인생은 간섭을 하지 말라고. 대학교에서는 농촌법학회에 들어가서 농활을 주로 했고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다녀와서는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전남 고흥)으로 갈 수는 없고 해남으로 내려갔지요. 그때 농촌운동하면서 해남YMCA에서 일을 했는데 첫월급을 타서 빨간 내복을 사서 고향에 갔더니 아버지가 대문을 안 열어 주셨어요."
_아버지는 농부셨나요?
"네. 할아버지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일본)고베로 일하러 가셨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하셨지요. 그때는 산에 있는 나무는 누구나 베어올 수 있어서 나무꾼을 하셨고 나중에는 머슴도 하셨다고 해요. 고흥의 신작로 공사장에서 만난 외삼촌에게 도시락을 갖다 주던 어머니를 알게 되어서 결혼하신 후에는 점차 살림을 모아서 제가 4남3녀 가운데 여섯째였는데 제가 성장할 때는 논도 열마지기나 되는 중농 정도는 되었어요.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못나온 분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천자문도 읽고 굉장히 성실하신 분이었어요. 저한테 처음 글자를 가르쳐주신 분도 아버지였어요. 제가 초등학교 시골에서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지나가시다가 얘가 턱걸이를 몇 번 못한다고 하시니까 아버님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 베어가지고 와서 마당에 철봉을 만들어주셨어요."
_농사는 직접 지었어요?
"해남에서 영암으로 옮겨서 날품팔이 농사를 짓다가 그 지역 청년들과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지요. 거기는 넓은 개간지에서 여름에는 수박 가을에는 무 배추, 대량으로 짓는 상업농업을 하는 곳이었어요. 저도 해봤는데 실패했어요. 그쪽에 사는 사람들은 3, 4년 실패하다가 어느 한 해 돈을 벌면 보완이 되는데 저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 무렵 전남 전농의 정책실장이 됐어요. 직업적인 농민운동가가 되려고 하니까 아무 기반이 없는 거에요. 그때 제가 송기호 정책실장 펀드를 제안했어요. 100명한테 한 달에 만원씩만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게 안됐어요. 날품팔이로 계속 살 수도 없고 장기적으로 농업운동가도 힘들겠구나 하는 상황에서 맏형님이 돌아가시고 건강을 상해서 광양에 요양도 가게 되다 보니까 농업을 포기했어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취직을 준비했어요. 스무 군데쯤 시험을 봤는데 다 떨어지고 국민은행에 합격해서 거길 다녔지요."
_사법고시는 왜?
"은행 들어가서 결혼도 하고 2년쯤 다니니까 생활이 안정되잖아요. 내가 그동안 살아온 거는 뭐였는가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공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적성이라면 그걸 살려야 하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사회복지나 노동 쪽의 공무원을 하려고 은행에 다니면서 행정고시 공부를 했는데 1차를 붙길래 장인어른한테 상의를 드렸지요. 2차 시험은 은행을 나와서 준비해야 될 것 같으니 허락을 해달라. 은행을 그만 두고 공부를 하면서 생각해보니까 변호사가 되는 게 공익적인 일을 하는 데 더 낫겠다 싶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_변호사로 다시 농업분야를 맡게 되지요?
"2000년 변호사로 막 시작했을 때 한국에는 쌀개방이 주요 쟁점이었어요. 97년 WTO 체제가 되면서 쌀시장 개방이 됐는데 이걸 10년을 유예시켰잖아요. 어떤 농민이 물었어요. 그러면 10년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정부는 10년간 쌀수입개방 안한다 발표한 게 다였어요. 그래서 제가 회사일을 하면서 하루에 한 시간씩을 빼서 이 연구를 했어요. 당시 분위기는 10년 뒤면 무조건 쌀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제가 연구해보니 얼마든지 재협상을 할 수 있는 거였어요. 재협상 안된다고 무조건 다른 나라 요구대로 한다면 누가 협상하려고 하겠어요. 적당히 결렬시키면 되지. 그 연구결과를 2001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에서 나오는 에 발표했어요. 2005년에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의뢰로 쌀협상 대책을 맡아서 정부자료를 많이 열람했는데 그때 보니 저의 기고를 놓고 정부 대책회의가 열렸더군요.(웃음) 농업운동하던 송기호에서 변호사 송기호에 방점이 찍히면서 농민들이 문제들을 하나씩 가져오기 시작했지요. 농민들이 의뢰인이라 보수를 마늘로 받아서 그럴 팔아서 회사에 낸 적도 있어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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