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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허원근 일병 의문사 "자살 vs 타살" 28년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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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허원근 일병 의문사 "자살 vs 타살" 28년 공방

입력
2012.06.0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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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의문사 허원근 일병의 부친 허영춘씨

'귀ㆍ대ㆍ중ㆍ사ㆍ망'.

1983년 4월 2일 오후 8시 전남 진도의 한 바닷가 마을 우체국으로 날아든 전보에는 이 같이 다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군 복무 중이었던 아들 허원근 일병(당시 22세)의 휴가를 하루 앞두고 기대에 차 있었던 허영춘(72ㆍ당시 43세)씨 부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한 통의 전보가 앞으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보를 받고 바로 아들이 근무하던 군부대(강원 화천 소재)로 달려갔지요. 밤새 택시를 타고 군부대에 도착하니 아침이 밝더라고요. '내 아들은 안 죽는다. 죽었을 리가 없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말하면서…. 말도 안 나오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더라고요." 국방부는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규정한 채 타살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허씨는 아들이 숨을 거둔 지 29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믿지 않는다. "내 아들이 자살할 이유가 도무지 없잖아요. 열심히 일하며 공부도 잘했고. 가정이고 뭐고 애로사항이 있어야 죽는 것 아닌가요. (군에서 발표하기를) 아들을 괴롭혀서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그 중대장(1998년 사망)도 제가 두어 번 만났는데, '아버님 저도 피해자입니다'고 말하더라고요."

허씨는 그 뒤로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기 위해 생업을 미뤄두고 백방으로 뛰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 가입해 2007년도에는 부회장도 맡았다. 허씨는 1988년 과천 정부종합청사 점거 농성을 벌였고, 국회 앞 1인 시위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시위가 없을 정도다. 농번기에는 진도에서 벼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서울로 올라와 시위에 참가하는 식으로 허씨는 29년을 보냈다. 허씨는 이미 오래 전 다른 자식들에게"그 동안 길러주고 장가보내주고 했으니 너희들의 삶을 스스로 살아라, 나는 내 할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올인' 했다.

평생 농부로만 살아왔던 허씨는 이를 위해 공부도 시작했다. 틈틈이 법의학 서적을 읽어온 지가 벌써 10년째이다. 허씨는 일부 법의학자들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해명해주기는커녕 자살로 몰고 있다고 믿고 있다.

"법의학 책을 읽어보면 본래 하늘에서 생명을 줘서 그런지 사람의 몸이 아주 치밀하게 돼 있더라고요. 타살로 죽은 시신에는 온 몸에 '나는 자살이 아니요'라고 써 있어요. 죽은 아들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좌측 가슴에서 나온 피는 검게 응고돼 있고, 우측 가슴과 머리에서 나온 피는 붉은색이더라고요. 그런데 심신이 50%이상 온전할 때 나온 피는 검게 응고되고, 정신이 희미하면 피가 나와도 응고가 안 된 답니다. 이게 다 법의학 책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배웠다는 법의학자들이 이걸 거꾸로 말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허씨는 자신의 장기와 시신을 기증하기로 서약도 했다. "하도 답답해서. 법의학 공부하는 학생들이 내 몸이라도 해부해서 제대로 된 법의학자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 서약한 거에요. 옛날에 조상들은 사람의 영혼이 원혼이 되면 하늘에 못 가고 구천을 헤맨다고 했는데, 법의학자들이 그런 불쌍한 원혼들을 구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허씨의 대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아들 생각만 하고 살만큼 한가하지 않아요. 일해야 먹고 사니까요. 마음은 너무 아프죠. 아프지만 정신 없이 살다 보니 그냥 살아지더라고요. 이제는 약속을 지키려고 끝까지 싸우는 겁니다. 아들이 죽은 날 택시 타고 화천으로 가면서 혼자 맘속으로 다짐했어요. '네 억울함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풀어주겠다'고요" 허씨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부부같이 억울한 사람이 수십, 수만 명이에요. 군 의문사로 자식을 잃은 유족들은 이제 그 억울함을 넘어서서 '더 이상 멀쩡한 젊은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국가에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허씨가 2007년 국가를 상대로 낸 아들의 죽음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2010년 2월 서울중앙지법은 허씨의 죽음을 타살로 인정하며 원고 승소 판결했으나, 국방부가 불복해 현재 서울고법에서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 사라진 탄피 1개·아무도 못들은 새벽 총성 왜?

1984년 4월 2일 오후 강원 화천의 한 최전방 부대. 7개월 전 입대한 허원근(당시 22세) 일병이 부대 막사에서 약 50m 떨어진 폐유류고 근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옆으로 쭉 뻗은 허 일병의 오른팔 곁에는 실탄이 채워진 소총이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겨눠진 채 놓여져 있었다. 가슴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허 일병의 몸에서는 모두 세 군데의 총상이 있었다.

군 헌병대가 몇 시간 후 현장에 도착해 조사에 착수했다. 현장 조사와 부대원들의 증언, 사체 부검 등을 거친 몇 주 후 '군 복무에 염증을 느껴온 허 일병이 사망 전날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하고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건 발생 다음날 허 일병은 휴가가 예정돼 있었다. 유족들은 "자살을 할 이유가 없었다. 타살이 분명하다"고 반발했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치열한 공방

허 일병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공방은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허 일병의 유족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문사위)에 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부터다. 2002년 9월 의문사위는 "허 일병이 타살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 발표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체 특별조사단(이하 특조단)을 통해 재 조사에 들어갔다. 같은 해 11월, 국방부는 "허 일병이 자살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2004년 6월 2차 위문사위는 다시 국방부의 결과를 반박했다. 한 사병의 죽음을 두고 국가기관끼리 대립하는 사이, 허 일병의 죽음은 '군 의문사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게 됐다.

허 일병의 죽음은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졌다. 허 일병의 유족이 2007년 국가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3년 가까운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은 '부대에 있던 누군가로부터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허 일병의 죽음은 자살로 볼 수 없다'며 사실상 타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국가가 총 9억2,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허 일병의 사인에 대해 "망인은 새벽에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했고, 몇 시간 뒤 망인의 가슴에 2발의 총알이 더 발사됐다"고 판단했다. 이미 타살된 허 일병을 자살로 은폐하고자 누군가 확인사살을 했다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의 한(恨)을 풀었다며 유족은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다. 반면 국방부는 법원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며 항소를 결정했다.

3년째 이어지는 2심 재판, 진실 공방 사실상 처음부터

2010년 3월 시작된 항소심 재판은 3년째 진행 중이다. 항소심에서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재판이 진행되는 것도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그만큼 진실을 밝히는 데 재판부가 고심하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1심 재판에 등장했던 증인이 다시 법정에 나왔고, 의문사위나 국방부 특조단에 사망 원인을 자문했던 법의학자들도 28년 전 사건 현장 사진과 자료를 들고, 나름의 과학적 진단을 재판부에 제공했다.

국방부는 현장 검증을 다시 신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28년이나 지난 지금, 현장이 당시와 너무 달라져 의미가 없다"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방부는 자살 장면을 다시금 재현하기도 했다. 국방부는 허 일병이 소총을 오른쪽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후 왼손으로 다시 왼쪽 가슴에 총을 쏘고, 마지막으로 머리에 총을 쐈다고 주장해왔다. 1심 재판부는 이를 두고,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방전이 팽팽히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3월에는 새로운 증인인 전모씨가 법정에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 허 일병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1심 재판에는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나오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허 일병의 타살을 증언할 결정적 인물로 유족 측이 신청한 증인이었다.

전씨는 법정에서 "허 일병은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내무반에서 총기를 가지고 다투던 중에 허 일병이 총에 맞았다는 걸 직접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문사위)에서도 같은 증언을 한 바 있다.

남겨진 의문, 2심에서는 풀릴까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풀지 못한 숙제도 떠 않고 있다. 1심과 마찬가지로 타살로 결론을 내릴 경우 유족측은 누가, 왜 허 일병을 죽였는지 판단을 내려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반면 국방부쪽은 1심이 간과한 법의학자들의 소견을 재판부가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28년이 지난 지금, 당시 부대원들의 증언이 구체적이지 않다며 과학적인 전문가의 말이 판단의 주요 근거가 돼야 한다고 주장이다. 실제 1심에서 타살로 자문했던 일부 법의학자는 당시 견해를 번복하고, '지금은 판단하기 어렵다'는 등의 의견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직후 허 일병의 몸에 난 3발의 총상. 하지만 현장에서는 탄피가 두 개만 발견이 됐다. 사라진 하나의 탄피가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2심 재판부가 풀어야 할 의문이다.

또 의문사위는 허 일병을 타살로 결론 내리며, 오전에 울린 두 발의 총성을 부대원들이 들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한 발이 몇 시간 전에 먼저였고, 두 발이 나중에 발사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울린 한 발의 총성을 들었다는 증언을 한 부대원은 없었다. 1심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2심 재판부 역시 "두 발 때보다 주위가 조용한 새벽에 울린 총성을 들을 사람이 없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자살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국방부와 타살이기 때문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유족 측의 공방은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2심은 올해 안에 결론 내려질 것으로 보이지만 그 결과가 어떻든, 양쪽 누군가는 대법원에 다시 판단을 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허 일병이 사망한 지 28년이 흘렀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게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 김훈 중위 사건 계기 관심 증폭… 규명위, 579건 조사

군사정권 시절 군의문사는 '묻히는 사건'일 뿐이었다. 군 복무 중 자살자가 나와도 군은 사망원인을 밝혀주기보다는 유가족들에게 신속한 장례를 종용하기 일쑤였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1980~1992년) 군 자살자는 연평균 224명. 지난해 군 자살자(97명)에 비하면 전체 병력 수를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다.

군의문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사망사건이다. 김 중위의 소대원들이 북한군과 접촉한 사실까지 세상에 알려지며 군의문사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김 중위 사건은 두 차례의 군 조사와 한 차례의 국회조사 등을 거치며 14년째 자ㆍ타살 여부를 놓고 군과 유가족들이 다툼을 벌이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6년 만들어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군의문사 문제를 독립적으로 다룬 최초의 정부기구로 579건의 군의문사 사건을 조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군의문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현재 각군 병원 영안실이나 군부대에는 유골함이나 시신의 형태로 모두 129구가 안치돼 있는데 이중 시신 상태로 가장 오랫동안 안치돼 있는 것이 나진영 해군 이병이다. 나 이병은 1998년 9월 부대 내 상습 가혹행위로 디스크를 얻어 휴가를 나왔다가 병원치료를 받은 뒤 집 앞 아파트 계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부대에서 타살된 뒤 집으로 옮겨졌다는 유가족과 투신자살했다는 군이 사망원인을 놓고 14년째 다투고 있으며 민간병원에 안치한 2억원대의 시신보관료를 놓고 병원과 유가족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2002년 3월 경계근무 중 불에 타고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 반모 이병 사건도 10년 넘게 군과 유가족들이 타살과 자살여부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현장 치우고… 증거 숨기고… '암흑 속 진실찾기' 겹겹의 벽에

1998년 4월 12일, 경북 지역 한 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숙소에서 비닐봉지를 뒤집어 쓰고 숨진 박도진(당시 24세) 중위. 군 수사기관은 자위행위를 하던 박 중위가 환각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비닐봉지 입구를 손으로 오므리는 바람에 저산소증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창졸간 비보를 듣고 한 달음에 부대로 뛰어간 박 중위의 어머니 김정숙(67)씨는 아들의 시신을 처음으로 마주한 14년 전의 그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아랫도리를 벗긴 채 거의 알몸으로 아들을 눕혀놨더라구요. 시신 주위를 이 사람 저 사람이 왔다갔다해 바닥은 흙투성이였고요. 과학수사를 한다더니 군은 현장 하나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습니다." 순직을 인정하지 않는 군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김씨는 시신 인수를 거부했고 박 중위의 유골은 경기도 한 보급부대에 14년째 임시 안치돼 있다.

심각한 현장훼손, 허술한 초동수사

2009년 제정된 국방부의 '군내 사망사고 발생시 처리지침'은 '완벽한 현장보존으로 수사여건 보장 및 대국민 의혹 불식'을 강조하고 있다. 수사관이 도착할 때까지 사체를 옮기거나 수습을 해도 안되고 물 청소 등 사고현장을 훼손하는 것도 금지돼 있다. 국방부는 이 원칙이 언제나 유지됐다고 말하지만 많은 경우 무시됐다는 점이 군의문사 사건이 장기화하는 주된 이유였다.

2009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박도진 중위의 경우 사망직전 읽고 있었다는 책의 만화페이지가 여성사진이 게재된 페이지로 바뀌었고, 시신의 치부에 덮여있던 휴지의 모양도 달라졌다. 이런 증거들은 박 중위가 자위행위 중 비닐봉지를 쓰고 질식사했다며 군 수사기관이 제시한 유력한 증거물이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군 수사기관이 박 중위의 사인을 자기색정사(自己色情死)로 예단하고 증거를 꿰어 맞춘 의혹이 있다고 지적했다.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지하벙커에서 관통상을 입고 숨진 김훈 중위 사건도 성급하게 현장을 훼손한 경우다. 최초 수사를 맡았던 미군 범죄수사대는 군 고위관계자들이 사고현장을 방문한다는 이유로 시신 수습 이틀 만에 벙커 안의 핏자국을 물걸레로 지우고 새로 페인트칠을 했다. 타살 용의자로 지목됐던 부대 관계자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수 있는 컴퓨터는 사건발생 후 6개월이나 지나서야 압수됐다. 컴퓨터는 그 사이 포맷돼 알리바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1998년 9월, 전투함정 장교로 복무하다가 부대를 이탈한 지 한 달 만에 야산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된 김태균(당시 24세) 해군 중위는 유족들이 사망현장이 아닌 영안실 냉동고에서 시신을 확인했다. 인권운동가 고상만씨는 "과거 군의문사 사건의 경우 현장 보존은 고사하고, 입었던 군복은 빨고 사망장소를 깔끔하게 청소해버린 경우도 흔했다"며 "초기의 불성실한 수사는 억울한 죽음을 양산하는 국가의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지휘관들 은폐가 불신 키워

유가족들은 자살원인을 부대 환경이 아닌 자살자 개인의 성격 탓으로만 돌리려는 군수사기관의 관행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자살로 결론이 난 많은 의문사 사건들에 대해 군 수사기관은 '본인의 내성적 성격에 따른 복무염증(厭症)'이라고 원인을 분석한다. 2002년 11월 경남 지역의 한 부대 운전병으로 복무하다가 간부와 선임들의 가혹행위 때문에 수송부 창고에서 목 매 숨진 채 발견된 김건우(당시 20세) 일병의 아버지 김해수(69)씨는 "자살할 이유가 없는 외향적인 애들도 자살만 하면 전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둔갑한다"며 "그렇게 돼야 다치는 사람이 없으니 죽은 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군 수사기관이 자살의 원인을 가혹행위나 폭언, 병영비리에 대한 불만 등 부대 환경으로 지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김건우 일병이 자살한 뒤 김 일병을 심하게 괴롭혔던 부대 간부가 처벌받기는 했지만 김 일병에 대한 폭행혐의가 아닌 다른 부대원들에 대한 폭행혐의가 적용됐다. 지난 3월 강원 지역의 한 부대에서 자살한 박모(21) 일병 사건에선 해당 부대 대대장이 박 일병을 괴롭힌 부대원 명단이 적힌 유서를 6일 동안이나 감추고 있었고, 간부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부대원들에게 허위진술을 강요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군이 조직 보호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실규명을 최우선시하도록 시각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군의문사를 둘러싼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김광식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개인적 원인이 아니고 병영부조리나 가혹행위 등 악습으로 자살했을 경우 이를 국가 책임으로 보는 유가족들의 시각을 군이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군 복무 중 자살자에 대해서도 순직 인정을 통해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적 상처를 입은 유가족들을 심리ㆍ정서적으로 치유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이유진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는 "군이 아닌 사회에서도 가족들은 친지의 자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사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며 "군 자살자 유가족들의 모임 등에 군이 예산을 지원해 유가족들이 심리상담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외국의 군 자살자 처리는

외국에선 군 복무 중 자살자가 발생했을 때 국가의 책임을 폭넓게 인정해 보훈혜택을 주고 보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군과는 인식 차이가 크다.

미군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자살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군 자살자를 처리하지만 구타, 가혹행위, 폭력, 심리적 압박 등 군 생활과 관련된 업무 연관성을 우선적으로 자살 원인으로 추정한다. 이성관계나 가정문제 등 개인적인 동기로 자살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자살을 군 업무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며, 이를 입증할 책임도 국가에 있다. 이에 따라 대부분 보훈혜택을 준다.

대만에서는 자해사망자를 질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과 같이 인정해 보상한다. 독일도 개인이 자유의사를 침해당해 자살하는 경우는 복무 중 사망으로 인정한다. 프랑스는 자살이 군 업무와 연관성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군인연금의 가족지급액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고, 군 업무와 관련 없는 자살에 대해서도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급한다.

미국, 대만, 프랑스, 이스라엘, 필리핀,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등에서는 군내 자살자도 국립(군인) 묘지에 안장해 최소한의 예우를 한다. 별도 묘지로 구분하지도 않고 일반 순직과 동일하게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김광식 한국국방연구원 교수는 "우리 군의 경우 자살 병사로 분류되면 일체의 보상과 예우가 인정되지 않고 있지만 병사들이 군내에서 겪는 구타, 가혹행위, 핍박, 불안 등 업무 연관성을 판단해 자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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