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다급히 울산으로 내려갈 일이 있었다. 고작해야 50분 가량의 비행이니 조금 과장하면 이륙하자마자 착륙일 텐데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글공부로 장원급제 하겠다고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다. 시집에 소설에 이 책 저 책을 집었다 놨다 막바지에 택한 것은 내용도, 저자도 아니고 핸드백에 쏙 들어가는 판형의 .
가수 이효리가 입양한 개 순심이와 함께 찍힌 표지가 환한 에세이였다. 처음엔 슬렁슬렁 기내에서 나눠주는 주스 한 컵을 손에 든 채 책장을 넘기다가 그 속도가 천천히 잦아들었던 건 그녀 특유의 솔직함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접점을 맞닥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피만 보면 호들갑 떨며 침을 흘려가며 이 털 저 털 몸에 감기 바빴던 나, 그 가죽이 벗겨질 때 고통 속에 비명을 삼켜야 했던 동물의 사정은 왜 미처 살피지 못했을까.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게 더 옳을 것이다. 당장 화려하고 멋스러운 내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눈 딱 감았던 것일 뿐.
한때 털 바람이 불어 부업으로 밍크를 키웠던 고모네 농장에서 죽어간 밍크들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불쌍하다, 죄 받을 거다, 그로부터 옷장 켜켜이 걸린 모피를 나는 이효리처럼 기부할 용기는 없으나 다만 올 겨울부터는 모직코트만 입겠노라 결심을 선언할 마음은 다지게 되었다. 올 겨울 지나가다 혹여 털 두른 나를 보시게 되거들랑 가감 없이 돌, 던지시라!
김민정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