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너/헤르만 코흐 지음·강명순 옮김/은행나무 발행·352쪽·1만2,000원
"우리 부부는 레스토랑에서 약속이 있다. 레스토랑의 이름은 지금 밝히지 않겠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59)의 특별한 소설 <디너> 는 이 두 문장으로 시작된다. 평범한 듯하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볼 때 의미심장한 문장들이다. 장편으로 결코 짧지 않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사건이 레스토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더욱 주목할 사실은 뒷문장에 암시돼 있다. 작중 화자 '나'가 감추는 것이 많다는 것.(숨기고 유보하는 진술은 수시로 반복된다) 고로 독자는 그의 말을 무작정 신뢰해선 안된다는 것. 디너>
전직 교사 파울('나') 부부는 형 세르게 부부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주앉는다. 세르게는 인기 정치인으로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다. 이 만남이 두 집안 자녀들의 문제와 관련돼 있음을 슬쩍 알리고는 '나'는 형과 식당에 대한 온갖 부정적 감정에 촉각을 세운다. 새끼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며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지배인부터 인기 정치인의 이미지에 가려진 형의 천박한 습성까지. 집요한 감이 없지 않지만 상류층의 허위가 까발려지는 터라 어떤 독자는 그에게 호감을 느낄 법도 하다.
신경전 속에 화려한 만찬을 들던 두 부부의 대화가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자녀들이 연루된 사건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파울 부부의 외동아들 미헬과 세르게 부부의 장남 릭이 저지른 일은 다름 아닌 살인. 현금인출기 부스에 있던 노숙인을 폭행하고 방화한 것이다. 수사는 답보 상태지만 부모들은 뉴스에 나온 CCTV 속 신원 불명의 용의자가 제 자식임을 금세 알아챈다. 파울 부부만 아는 사실도 있다. 아이들의 범행을 좀더 자세히 촬영한 휴대폰 동영상이 인터넷에 떴고, 그걸 올린 이가 세르게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입양한 아들 베아우라는 것. 베아우는 동영상 추가 폭로를 무기로 의붓형과 사촌에게 돈을 뜯어내려 하고 있다.
파울은 아들을 비호하면서도 일말의 죄의식도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당혹감을 느낀다. "(아들의) 눈빛에 뭔가 다른 게 섞여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골칫덩어리 아빠 때문에 정말 성가셔 죽겠네, 라고 눈빛이 말했다."(186쪽) 제 핏줄에 대한 아연한 감정이 그를 회상에 젖게 하고, 그 결과 어떤 독자라도 그에 대한 호의를 철회할 만큼 충격적인 전력들이 속속 드러난다.
세르게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을 자수시키고 자신은 정계은퇴하겠다고 선언한다. 외아들의 범행을 끝까지 숨길 결심을 한 파울 부부는 이 청천벽력에 거세게 저항한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는 세르게의 속물근성과 냉혈한 아들을 끝까지 두둔하는 파울 부부의 비뚤어진 애정이 부딪치면서 소설은 예측 불허의 대단원을 맞는다.
'믿을 수 없는 화자'를 내세운 독창적이고도 세련된 전개 방식으로 작가는 등장인물들, 더불어 현대인의 허위의식을 하나씩 벗긴다. 마침내 드러난 우리의 야만 앞에 몸서리치지 않을 독자는 많지 않을 듯하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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