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장, 장관, 고위 관료까지.
사모펀드(PEF) 시장이 별들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국내 PEF는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화려한 경력의 내로라하는 이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던지는 이유다.
2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등록된 PEF는 모두 194곳으로 올 들어서만 17곳이 새로 생겼다. 2007년 44곳에 불과하던 것이 불과 4년여 만에 4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투자자(무한ㆍ유한책임사원)들이 출자하기로 약정한 금액도 34조1,412억원에 달한다.
PEF는 소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조달해 기업 주식 등을 사들여 기업가치를 높인 뒤 매각 차익을 남기는 펀드다. 2004년말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투자수단을 다양화하겠다는 취지로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PEF 시장이 짧은 기간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PEF가 눈독을 들일만한 기업 매물이 대거 쏟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타'들의 역할도 상당했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은 국내 PEF 시장의 터를 닦은 인물이다. 미국계 칼라일펀드에서 칼라일아시아 회장직을 맡아 한미은행 인수를 주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 독립적으로 MBK파트너스를 세워 국내 최대 PEF로 성장시켰다. 수도권 최대 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인 C&M의 최대주주인 것을 비롯해 한미캐피탈, HK저축은행, KT렌탈 등의 지분을 사들이며 웬만한 재벌 총수를 능가하는 위세를 과시한다.
김 회장이 PEF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인 반면, 비슷한 시기 보고펀드를 출범시킨 변양호 대표는 경제계 별들의 PEF 업계 진출의 물꼬를 튼 인물. 한창 잘 나가던 때 공무원 생활(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을 접고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변 대표는 동양생명, 비씨카드, 아이리버 등의 대주주로 자리잡았다. 김영재 칸서스자산운용 회장도 이들과 함께 PEF 1세대를 이끈 인물로 꼽힌다. '이헌재 사단'의 핵심 멤버인 김 회장은 PEF를 통해 의료벤처 메디슨을 사고 팔아 큰 차익을 남겼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규베스트 대표는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 정보통신부장관 등을 지냈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미래가치가 우수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한 국내외 정보기술(IT) 업체에 전문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대림음향, 포스코파워, 일진반도체, 청담러닝 등이 대표적이다.
은행장 출신의 PEF 행(行)도 이어지고 있다. 민유성 티스톤파트너스 회장은 지난해 산은금융지주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 PEF로 자리를 옮겼고, 최근 이덕훈 전 우리은행장도 '키스톤 프라이빗에쿼티'를 설립하고 회장직을 맡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전 행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 우리나라에도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모펀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이밖에 구본진 전 기획재정부 재정업무관리관은 사회기반시설에 투자하는 트루벤 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하는 등 관료 출신의 도전도 잇따르고 있다.
'먹을 것'이 제한돼 있다 보니 국내 PEF간 경쟁도 치열하다. 지난해 우리금융 인수전에 MBK파트너스, 보고펀드, 티스톤 등이 참여했다 모두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번에도 이덕훈 키스톤 회장이 우리금융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PEF 업계 한 관계자는 "론스타 등이 국내에서 엄청난 차익을 챙기는 것을 보고 경제계 스타들이 앞다퉈 PEF에 뛰어드는 것 같다"며 "하지만 아직 전문인력이나 자본조달 능력 등의 면에서 외국 PEF들과 경쟁하기엔 한계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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