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은 법과 정의와 상식을 무너뜨린다. 오로지 자기만의 법을 만들고, 정의를 세운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한다.
'질린다'는 표현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끝내 사퇴를 거부하면서 뻔뻔하게 위장전입의 꼼수까지 쓰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서른 두 살의 이 젊은이가 무섭다. 아무리 운동권을 휘저어 다녔다고 해도 아직은 풋내기인 그의 사상이나 신념이란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그 사상이란 것도 수단에 불과함을 이제 세상이 다 알아버렸다. 그보다는 무서운 것은 신념이 된 젊은이의 탐욕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국회의원을 놓지 않겠다는 집착이 정확하게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아직 의정활동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알 길은 없다. 누구의 후계자로 조직의 생존을 위해, 아니면 이석기와 함께 의회 안에 종북세력의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역시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다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국민 여론이 들끓고 있는데도 '나 아니면 안돼'를 굽히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례대표 본래의 취지와 역할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비례대표 당선자 김재연은 청년대표를 표방하고 있다. 나이도 그렇고, 권력지향적 운동이든 아니든 지난해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집행위원장과 반값등록금 국민본부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으니 그럴만하다. 그렇다고 꼭 그가 청년대표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소수여서가 아니다. 비례대표란 제도는 우리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고, 소수자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아무리 자격이 충분하고 목적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절차상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대표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고 상식이다. 민주적 방식으로 가장 반민주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재연은 그 기본과 상식을 묵살하고 있다. 반국가적인'종북세력'을 대표한다는 극단적 소리까지 듣고 있는 이석기도 마찬가지다.
절차상 문제가 있더라도 나를 뽑아준 당원들만이 총투표로 사퇴시킬 수 있지, 여론재판에 의해 물러날 수 없다는 것도 그럴 듯하지만 궤변이다. 이에 대한 칼럼니스트 한윤형의 한국일보 17일자 <2030 세상보기>의 비판이 날카롭다. 당원들이 그들을 비례대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총선에서 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 역할은 당원에 요구에만 복종하는 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론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백 번 옳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당선자들의 사퇴 거부는 민주와 정의를 강하게 내세우는 집단일수록 자신들은 그것들과 거리가 먼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민주와 정의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고자 하는 탐욕임이 드러났다. 보수도 부정과 비리를 일삼지만 그래도 일말의 염치라는 것이 있다. 권력에 대한 탐욕 앞에서 진보는 아예 그것조차 없다. 진보의 가치만 앞세우면 모든 것이 용서받는 세상이 아니다. 부정과 반민주, 부패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후보들을 경선으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외부 인사를 영입하긴 했지만 여전히 권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천심사위원회 심사로 뽑았다. 방식은 통합진보당이 훨씬 민주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속셈이 어디에 있든 이자스민을 선택한 새누리당이 더 민주적, 진보적이었다. 결혼이주여성, 다문화가정이야말로 누구보다 통합진보당이 앞서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내부 권력다툼과 이념의 도그마로 그들의 눈은 멀고, 귀는 막혔다. 그러니 부정이 보이지 않고, 국민 여론은 들리지 않을 수 밖에.
어차피 세상은 조금씩 진보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정당의 변화와 이번 총선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시장주의가 생명을 다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진보도 어느 특정집단의 전유물이나 특권이 될 수 없다. 깨끗한 양심과 민주적 집단만이 그것을 추구할 자격이 있다.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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