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갈 곳을 잃었다. 부동산시장은 얼어붙은 지 오래이고, 그나마 은행 예금보다 이자 몇 푼이라도 더 얹어주던 저축은행은 영업정지 사태로 줄줄이 무너지며 신뢰를 잃었다. 2,000고지를 돌파하며 반짝 비상하던 증시마저 최근 유럽 위기의 확산으로 추락하고 있다. 어딜 둘러봐도 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다.
투자자들은 돈의 피난처를 찾기에 급급하다. 단기 금융상품의 대표주자인 머니마켓펀드(MMF)와 수시입출금예금(MMDA) 등 '2M'이 시중의 뭉칫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딱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으니 당분간 금융시장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21일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MMF는 이달 들어 17일까지 10조5,210억원의 시중자금을 끌어 모았다. 4월 한달(9,330억원)보다 10배나 많은 액수다. 코스피지수가 3% 넘게 빠졌던 16일 하루 동안 2조원 가까이가 몰렸다.
덕분에 지난해 53조원 수준이던 MMF 설정금액은 현재 75조원을 훌쩍 넘었다. 그리스의 뱅크런(예금 대량인출) 사태가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로 번질 조짐을 보이자 기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나섰고, 개인들 역시 코스피지수 1,800이 무너지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증시에서 발을 빼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업계 1위 대형 저축은행까지 영업정지되자 이를 피해 빠져 나온 돈들도 이런 관망성 유동자금 대열에 합류했다.
주식투자의 관문으로 여겨지는 종합자산관리계좌(CMA)도 돈의 임시대피소 역할을 하고 있다. 1월 41조6,990억원에 달했던 CMA 잔고는 증시 반등에 힘입어 지난달 말 40조1,540원까지 줄었으나 5월로 접어들면서 다시 늘고 있다.
은행의 MMDA 역시 잔고가 가파르게 불어나고 있다. 4월 13조3,000억원 감소했던 MMDA가 이달 들어 6조원 넘게 급증한 것이다. 지난달 말 빠져나간 자금이 헤매다가 결국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월초부터 다시 유입되는 모양새다. 반면 지난해 말 63조원 규모였던 저축은행 수신잔액은 3개월 새에 9조원 가까이 줄었고, 최근 영업정지 여파로 더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금과 MMF, CMA, MMDA, 6개월 미만 정기예금 등 단기 유동자금은 현재 670조원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12월(659조5,000억원) 정점을 찍고 지속적으로 줄어들던 단기 자금은 지난해 8월(643조원) 반등한 뒤 증가 추세다. 연초 이후 반짝 상승한 증시가 그나마 일부를 소화했지만 최근엔 다시 토해내고 있는 상황이라 더 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시중자금을 빨아들였던 공모주시장도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부동산은 대안으로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강남대책으로 불리던 5ㆍ10 부동산대책이 약발은커녕 실망감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돈이 돌지 않아 매수세가 실종된 건 물론이고 가격마저 떨어지고 있으니 부동자금을 유인하기엔 역부족이다.
김성봉 삼성증권 시황팀장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돈이 더 스마트해졌다"며 "기업실적이나 경제 이슈 등 다른 호재가 있더라도 확실한 그리스 문제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면 돈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다음달 17일 그리스 재선거까지는 시장이 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아 당분간 투자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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