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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6·끝> 정약용 vs 오규 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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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다산 정약용 다시 읽기] <6·끝> 정약용 vs 오규 소라이

입력
2012.05.2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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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과 오규, 조선·일본의 脫주자학 흐름 주도…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사실 서양 역사에 적절한 용어이며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는 용어이다. 그러나 사상사에서는 이 말이 보다 안정된 의미를 띨 수 있다. 중세란 우선 거대 제국들의 시대이다. 고대에 거대권력이 해체되면서 다원화되었던 세계가 다시 거대 제국들에 의해 통합된 시대가 이 때이다.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마우리아 제국, 그리고 동북아 중원의 여러 제국들이 그런 거대권력들이다.

이런 거대 제국들의 시대에 이르러 철학, 종교, 정치학 등 사상의 차원에서도 통폐합이 일어나게 된다. 철학사적으로 중세란 고대의 철학적 실험들 중 특정한 하나의 사상이 각 문명의 '정답'으로 채택되어 교조화/종교화 또는 통치이데올로기화된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지중해세계에서의 세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인도에서의 두 종교/철학(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동북아에서의 두 종교/철학(유교와 도교)이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정치적으로는 거대 제국들이, 사상적으로는 이 교조화된 철학/종교가 중세를 특징짓는다.

그래서 이 시대에 등장한 철학들은 고대에 이루어진 사유 실험들 중 어떤 갈래를 잇되, 그것을 거대한 사변적 체계로 확장한 사상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들은 당대의 거대 제국들의 성격과 맞물리면서, 영원한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불멸의 신전과도 같은 위용을 갖추기에 이른다.

본연과 원융의 사유-주자학

이런 중세 사상들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주자학이다. 주자학에서 우리는 '본연(本然)'이라 할 만한 것을 찾아서 그로써 모든 것들을 '원융(圓融)'하게 아우르고(자리를 잡아주고) 그로써 영원의 자아와 국가를 정초하려 했던 중세인들의 꿈을 본다.

이런 꿈의 무게는 '리(理)'라는 말에 걸리게 된다. 천지만물을 혼돈이 아니라 조화로,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로, 야만이 아니라 도덕으로 비추어주는 원리로서의 리에 대한 믿음이 주자학, 넓게는 성리학을 특징짓는다. 그리고 인간의 본연의 마음 역시 이 리와 다른 것이 아닌 '성(性)'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주자학은 세계에 대한 낙천적 믿음과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세계의 '본연'을 이렇게 이해할 때 현실은 이런 리의 세계와 너무나도 다른 무엇으로 다가오기에, 이제 주자학은 이 현실을 설명해야 할 '이론적 부담'을 지게 된다. 따라서 본연이 그토록 무구한 '리'인데도 현실이 이토록 혼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역이 도입되어야 했다. 이 악역은 '기(氣)'가 맡게 된다. 세계는 리와 기의 착종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로 이루어진 현실이 어떻게 변하건 본연의 리는 훼손되지 않고서 꿋꿋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한다. 기란 리라는 거울에 끼는 먼지일 뿐이다. 물론 그 먼지에도 등급이 있어, 그 등급이 현실의 퇴락 정도를 설명해 준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고 또 닦아 본연의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기의 청탁(淸濁)에 따른 가치의 서열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탈-주자학과 모더니티의 사유

주자학은 동북아세계를 상당 기간 지배했다. 중원의 송ㆍ원ㆍ명, 반도의 조선, 열도의 에도 막부는 주자학이라는 철학에 근거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이윽고 양명학이 출현해 주자학과 대립각을 세웠고, 주자학을 만개시킨 조선에서도 18세기 정도면 비-주자학적, 반-주자학적 사유들이 우후죽순처럼 펼쳐졌으며, 에도 막부의 경우에는 주자학이 발달한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아 이미 탈-주자학적 사유들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근대성=모더니티'라 부르는 삶의 양식은 이런 탈-주자학적 흐름들로부터 배태되었다.

탈-주자학적 철학소들―철학적 사유의 요소들―은 다양하다. 야마가 소코오(山鹿素行)는 주자학의 정적주의(靜寂主義)를 비판하면서, 그저 말없이 앉아 마음을 닦는다고 진정한 유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역설했다. 탈-주자학적 사유들은 대개 주자학에 스며들어 온 도가적-불가적 측면들을 공격하곤 했다. 리 개념은 결국 불가의 '공(空)'이나 도가의 '무(無)' 개념의 변형이 아닌가?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말처럼 "리가 있은 연후에 기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리란 단지 기 안에 있는 조리일 뿐이다." 무(無)인 리를 유(有)인 기 앞에 놓는 것이 주자학적 정적주의의 토대라 보았던 것이다.

'성'이란 본연으로서 즉자적으로(그 자체로써)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이상태이다. 본연지성이란 이상태이며,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은 기질지성이다. 현실의 인간을 죄악시할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 연후 그로부터 이상태를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다.

오규 소라이(荻生狙徠)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이런 탈-주자학적 흐름의 정점에 서 있다. 오규가 주자학을 탈피코자 했다면 모토오리는 아예 중화중심주의를 탈피코자 했다면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연대기적 차이를 넘어서는 심대한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오규는 주자학적 내면성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외면적 사유를 추구했다. 그에게서 '리', '성', '심', '경' 등등의 범주는 탈락되고 '예ㆍ악ㆍ형ㆍ정'이 전면을 차지하게 되며, 주자가 만들어놓은 '사서'에 대한 연구가 고대의 경전들을 연구하는 '고문사학(古文辭學)'으로 대체된다. 아코 낭인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훗날 <주신구라> 로 극화되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오규는 이들의 '의리'를 인정하면서도 그런 "사적인 것"은 결코 "공적인 것" 즉 법도에 앞설 수 없다고 하면서 그들의 할복을 주장했다. 오규는 한편으로 고대 경학 연구로의 회귀를 통해 주자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이루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예악형정에 기초한 (오늘날로 말하면 사회과학적인) 경세학을 통해 근대성의 한 단초를 마련했다.

다산과 근대성-성취와 한계

이런 식의 탈-주자학적, 반-주자학적 사유 양태들은 조선에서도 풍성하게 전개되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그런 흐름의 정점에 위치한다. 주자학으로 대변되는 성리학은 비가시(非可視)의 차원에 대한 사변에 기초한다. 그것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상상력이었다. 정약용은, 영국 경험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를 가시성의 장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그는 본연과 현실을 합치시키고자 했으며, 오규의 고문사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고대 문헌들을 새롭게 읽고자 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연속성도 끊어지기에 이른다. 다산에게 성이란 본연의 무엇이 아니라 현실의 무엇이다. 모든 것은 기질에 입각해 논의된다. 주자처럼 선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리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부여되며 기의 차이에 따라 사물들의 차이가 형성되지만, 경험적 구도를 취할 경우 기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기의 불연속을 밑에서 메워주던 리의 연속성은 해체된다. 초목금수(草木禽獸)와 인간은 도덕성에 있어 단절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이란 주자의 리가 아니라 현실적 본성이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현실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성인 도의심을 발달시켜 성이라는 이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중세적 정적주의는 근세적 주체철학에 의해 대체된다. 다산은 이 주체의 철학을 고대 경전의 광범위한 재해석을 통해 다른 누구보다도 정치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오규처럼 다산 역시 미래로 창조해 나가기보다는 과거로 회귀하는 길을 택했다. '상제'를 긍정함으로써 고대적 종교로 회귀하고, 오규처럼 고대의 성인을 '본'으로 삼음으로써 주자학적 본연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본연을 따랐으며, 도의심의 근거를 찾아 다시 '천명'으로 돌아간다. 이 점에서 두 사람 모두 근대의 문턱에서 오히려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두 사람의 한계라기보다 시대적 한계라 해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미래로 자신들을 열어 갈 인식론적 장도 정치적 장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단지 현실의 왕조/막부를 고대적 본에 따라 새롭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누구도 시대적 한계를 한꺼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

■ 오규 소라이는…에도시대 반주자학 사상가… '논어' 현실적으로 재해석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이자 문헌학자 오규 소라이(1666~1728)는 이토 진사이(1627~1705),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와 함께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꼽힌다.

도쿠가와 막부 5대 쇼군의 시의(侍醫)였던 오규 가게아키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1679년 유배 당한 아버지를 따라가 유배지에서 주자학을 독학했다. 1692년 아버지가 사면되면서 에도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했고, 5대 쇼군의 총신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아스에게 1696년 발탁돼 17년 동안 그의 정치 고문 노릇을 했다. 1709년 5대 쇼군이 사망해 야나기사와가 실각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본격적으로 저술 활동에 돌입해 독창적인 '반주자학' 사상을 세웠다. 주자학에 입각한 고전 해석을 거부하고 고대 중국의 고전을 독해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고문사학(古文辭學)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나기사와와 8대 쇼군 요시무네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그는 지극히 현실적 태도로 고전을 해석했고, 특히 주자학에 대한 적극적인 반론을 담아 <논어> 를 재해석했다. 일본 정치사상계 거장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ㆍ1914~1996)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 (1952)에서 오규 소라이에 이르러 일본의 주자학이 비로소 도덕과 정치가 분리된 근대적 정치사상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오규의 사상은 뒷날 그의 제자 다자이 순다이가 쓴 <논어고훈외전> 을 통해 다산 정약용에게도 전해진다. 다산은 <논어고금주> 50개소에서 오규의 학설을 인용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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