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극장마다 '어릿광대들이 공연은 무슨 공연…. 저리가!'라는 말밖에 없었죠."
마임 전공자 다섯이 뭉쳐 공연을 하겠다며 찾은 수 많은 극장에서 문전박대 당하던 시절을 떠올리던 유진규(60)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은 "격세지감"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임의 불모지나 다름 없던 이 땅에 씨앗을 뿌린 지 24년. 그의 춘천마임축제는 프랑스 미모스마임축제, 영국 런던마임축제와 함께 세계 3대 마임축제로 자리매김했다. 20일 '태초에 몸이 있었다'라는 주제로 8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간 마임축제를 총지휘하고 있는 유 감독을 18일 만났다.
국내 최고 수준의 마임 공연을 선보이며 이 분야의 '대부'가 된 그지만 축제 시작 전으로 시계를 돌리니 설움이 북받친다. "알아주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어요. 몸짓으로만 의미를 전달한다고 하니 극장주들은 광대놀음이라고 했죠. 오디션조차 안 보려고 했으니까, 마임 예술가들은 굶어 죽으라는 소리였죠." 절박함이 생겼고, 그 핍박 속에서 시작된 게 '마임축제'였다.
사실 당시의 마임은 최첨단의 예술이었다. 때문에 서울 종로의 한 공연장에서 어렵사리 시작한 첫 축제는 차라리 '실험'이었다. 그는 "당시 마임은 예술인들에게도 난해한 장르였다"며 "마임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자는 생각으로 2회부터는 춘천으로 옮겼다"고 했다.
축제장 이전을 놓고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나왔다. '서울도 소화하지 못한 장르인데 지방에서 되겠냐' 등등. 하지만 밀어붙였다. 세계적인 예술 축제들이 아비뇽, 에든버러, 깐느 등 인구 3만~5만의 소도시서 개최되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됐다. 어디 그 뿐인가. 낭만의 대명사이던 경춘선의 종착역도 춘천이었다. 그는 "서울과 멀지 않고, 적당한 인구의 춘천이 마임 바람을 일으키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무연고 춘천에 자리잡은 가난한 예술가들은 사비를 털 수밖에 없었다. 돈을 받고 한 게 아니라 돈을 내고 공연을 했다. 그러자니 여느 때 길거리 공연은 필수였다. 허름한 공연장과 거리를 전전하길 2~3년, 기회가 왔다. 입 소문을 타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자 92년 춘천시에서 공동주최를 제안한 것. 그는 "프로의 세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대중과의 소통에 대한 열망이 커지던 때였다"며 "춘천시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지역과 소통하는 지역예술축제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춘천시의 지원으로 숨통이 트이면서 다양한 시도가 시작됐다. 금요일 밤 10시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6시간짜리 논스톱 프로그램, '도깨비난장'이 대표적인 경우. 국내 예술축제 중에서는 가장 먼저 시도된 밤샘공연으로, 일방적인 공연이 아닌 대중과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유 감독은 "98년 처음 시도 당시 폭발적 반응이었다"며 "직접 몸짓으로 소통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한 게 적중했다"고 말했다. 매년 1만명 이상의 관객들이 찾는 도깨비난장은 춘천마임축제의 꽃으로 평가된다.
예술은 실험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72년 서울의 한 극단에서 처음 마임을 접한 뒤 올해로 꼭 40년을 맞는 유 감독이지만 춘천마임축제는 그에게 여전히 실험의 장이다. "지금도 무대 앞에 서면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합니다. 몸짓으로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24년 전 5명의 마임이스트로 시작한 축제에는 올해 해외 10개 팀을 포함해 100여 개 극단, 900여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다.
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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