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법. 최근 주요 세계 대회서 중국세가 맹위를 떨쳐 한국 바둑 위기설까지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준우승 전문' 백홍석이 거센 황사돌풍을 잠재우고 당당히 세계 정상에 올라 한국 바둑의 자존심을 지켰다.
백홍석은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벌어진 제4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결승 5번기서 중국의 신예 강자 당이페이를 3대 1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우승은 백홍석 개인에게 최고의 영광이자 한국 바둑으로서도 매우 값진 승리다.
백홍석은 우선 '9전10기'의 끈질긴 투혼으로 자신의 바둑사에 큰 획을 그었다. 2001년 입단 이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본격기전에서, 그것도 세계 최대 규모 기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 명인전 기성전 바둑왕전 십단전 TV바둑아시아선수권 등에서 무려 아홉 차례나 준우승에 그쳤던 설움을 한 번에 깨끗이 털어낸 것이다. 백홍석은 내년에 군 입대 예정이어서 남은 기간 동안 마음을 비우고 한 판 한 판 열심히, 즐겁게 바둑을 두겠다고 생각하고 대회에 임했는데 뜻밖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며 기뻐했다.
사실 비씨카드배 본선 32강전이 벌어지고 있던 때만 해도 한국의 우승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세돌과 이창호가 각각 당이페이와 미위팅에게 무릎을 꿇는 등 한중전 11판 중 무려 10판을 져서 백홍석 박영훈 이원영 등 불과 3명밖에 16강전에 오르지 못했다. 국내 바둑계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고 상대적으로 중국 선수들은 기세등등,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돌주먹' 백홍석의 강펀치가 힘을 발하기 시작했다. 16강전에서부터 준결승전까지 니우위티엔, 저우루이양, 후야오위를 잇달아 꺾고 당당히 결승에 진출했다. 모두 역전승이었다.
결승전 상대 당이페이는 올 들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 세계 대회서 17연승을 기록 중이었지만 세계 정상에 올라서기엔 아직 경험이나 배짱이 부족했다. 매번 중반까지 형세를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도 종반에 초읽기에 몰리면서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백홍석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상대의 털끝만한 실수를 날카롭게 추궁해 역전승을 이끌어 냈다. 결승 1국을 내줬지만 이후 세 판을 내리 이겨 꿈에 그리던 세계 대회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국내 바둑계로서도 백홍석의 비씨카드배 우승이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같이 무척이나 반갑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점차 확대되고 있던 '한국바둑 위기설'을 시원하게 걷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중국 신예들의 강세에 밀려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던 동료 선수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것 같다. 사실 백홍석이 꾸준히 랭킹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국내 바둑계서 톱랭커로 평가 받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번에 백홍석이 중국 신예들을 잇달아 물리치고 마침내 정상까지 오름으로써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이번 대회에 출전한 중국 신예들이 전반적으로 매우 높은 기량을 보여줬지만 세계 정상권에 진입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동안 국내 기사들이 '90후 세대'에게 느꼈던 과도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백홍석의 비씨카드배 우승으로 기세를 탄 한국 바둑은 23일부터 대만에서 개최되는 제7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다시 한 번 정상을 노린다. 출전선수는 전기 우승자 최철한, 4기 우승자 이창호와 이세돌, 박정환, 원성진, 김지석 등 여섯 명이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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