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피우는 건 아니나 느리디 느린 움직임. 껍데기 아래 작고 연약한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전진하는 달팽이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다. '속도에 대한 불안으로 마모되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자기 치유의 시간을 선사하는' 그림책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처럼 여백이 시원한, 휴식 같은 책이다.
달팽이가 지나는 길 위에서 여러 개체들을 만나며 얻는 깨달음 역시 잔잔하고 소박해 더 와 닿는다. 달팽이는 "세상에 나보다 못난 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제 보니 나는 그렇게까지 엉망인 건 아니야"라고 때론 위안하고, "모든 원한은 그저 스스로 씌운, 눈에 보이지 않는 굴레일 뿐이었다"고 성찰하며 왜소한 자신을 다독여 앞으로 나간다.
중국 유명 북디자이너 주잉춘의 편안하고 정감 있는 그림책 는 동양풍의 세밀화 기법으로 우리 정서에 잘 맞는다. 1년간 달팽이를 기르며 관찰했다는 주잉춘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3년에 걸쳐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부지런히 작업했다고 한다. 송충이의 털 하나하나, 잠자리 날개의 무늬까지 생생하다. 저우쭝웨이 글, 장영권 옮김. 펜타그램ㆍ140쪽ㆍ1만6,000원.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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