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앞바다 마도 해역은 물살이 세서 예부터 배가 많이 침몰한 곳이다. 여기서 2009년과 2010년 발굴한 고려시대 선박 마도 1ㆍ2호선에서 당시 개경으로 싣고 가던 물품 목록을 적은 목간(먹으로 글씨를 쓴 나뭇조각)과 함께 길이 27~28cm의 정체 불명 나무토막이 나왔다. 1호선에서 한 점, 2호선에서 두 점. 생김새는 목간 같은데, 글씨가 쓰여 있지 않고 ━ , × 표시를 새긴 칼 자국만 있는 것이 이상했다. 전에 발굴된 적이 없는 이 유물은 발굴보고서에도 그냥 '목재'라고만 올라갔다.
고려시대 목간을 연구해온 고고학자 임경희(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씨는 이 수상한 나무토막의 정체가 내내 궁금했다. 올해 초에야 실마리가 풀렸다. 고려에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 에서 관련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고려는 주산이 없어서 관리들이 물품을 출납할 때 나무토막에 칼로 수량을 새긴다", 딱 한 줄이었다. 아, '각기목'(刻記木)이구나. 각기는 칼로 새겨 표기하는 일, 곧 서긍이 말한 고려의 숫자 표기법이니, 기록으로만 전하던 고려시대 셈법을 보여주는 실제 유물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고려도경>
임씨는 19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문화운동단체 문문(文文)의 창립 기념 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다. "문자로 쓰지 않고 기호를 새기는 각기는 한자를 쓰지 않던 사람들의 숫자 표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긴 끈을 여러 번 묶어서 그 매듭의 개수로 숫자를 나타내는 결승(結繩)도 문자를 대신한 숫자 표기법이다. <고려도경> 은 고려의 각기를 말하면서 "기록법이 이처럼 단순한 것은 옛날 결승의 영향이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도경>
그렇다면, 각기목에 새겨진 기호 ━와 ×는 정확히 어떤 숫자를 가리키는 것일까. 아직 거기까지는 모른다. 임씨는 "━ 표시 여러 개 위에 × 표시 식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가 더 큰 단위를 나타내는 기호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라며 "관련 사료가 전혀 없어 추정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수학사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이 협력해 밝혀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를 여는 문문(회장 홍승직 순천향대 중문과 교수)은 "한국문화와 세계인류문화에 대한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을 표방하는" 학술문화운동단체다.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 서지학 문학 언어학 지질학 고인류학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애호가 152명이 모였다. 올해 1월 초 페이스북에 둥지를 틀고 활동하다가 지식과 정보를 대중과 나누고 소통하려고 학술대회를 마련했다.
학술대회는 '인류문명과의 만남_고대 근동에서 인도, 인도에서 동아시아까지'라는 큰 주제 아래 1부 동아시아 새로 보기, 2부 인류문명과의 만남으로 나눠져 있다. 고려의 각기목에 대한 첫 보고 말고도 흥미로운 논문이 많다. 금동반가사유상의 도상학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반가상만 사유상인가'(고혜련ㆍ부산대), 인류의 4대 고대 문명 중 아직 생소한 편인 '인도 하라판 문명의 세계'(김용준ㆍ인도 데칸대학), 오직 하나의 신만 섬기라고 하는 구약성서의 저층에 고대 근동의 다신교 신앙이 있음을 밝힌 '구약성경의 신들'(주원준ㆍ한남성서연구소) 등 총 8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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